▲청각장애
언스플래쉬
십여 년 전, 글쓰기 모임에서 '기록되지 않은 노동'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기로 했을 때다. 나는 요양보호사를 만나 그들이 일하면서 겪는 어려움이 무엇인지를 듣고 싶었다. 마침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는 지인이 떠올라서 약속을 잡고 그를 찾아갔다. 그는 대뜸 내게 물었다.
"나는 문세경씨가 청력이 좋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인터뷰를 할 수 있나? 얼마나 들리고 얼마나 안 들리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당신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가 곤란하다."
처음 만나서 이야기하는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위와 같은 말을 하는 그를 보고 나는 몹시 당황했다. 매우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나의 장애를 이해할 거라고 믿었다. 식사도 같이한 적이 있고,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상식을 갖고 있을 거라 믿었던 사람에게서 듣은 말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대화를 이어가기 힘들었다. 얼굴은 달아올랐고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결국 인터뷰는 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 '당신의 반응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인 것을 아느냐'는 내용으로 메일을 보냈다.
그는 '내가 출마한 적도 있고, 성소수자 운동도 하는 사람인데 당신이 청각장애가 있다고 인터뷰를 거절했을 리가 없다. 나는 단지 당신의 장애 상태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해서 인터뷰에 응할 수 없다고 말했을 뿐이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전형적인 자기 합리화라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그의 행동은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차별에 해당하는 언행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몇 번의 메일이 오갔고, 인터뷰를 거절한 것은 명백한 장애인 차별이므로 나는 사과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는 사과하기를 꺼렸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장애에 대한 올바른 인식도 없이 인터뷰를 거절하는 행동을 했겠지.
혼자 힘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지인의 생각도 나와 같았다. 삼자 대동을 하고 사과하기를 요청해 겨우 사과를 받았다.
그 일을 겪은 지 십 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때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청력이 좋지 않다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만나서 밥 먹고 수다를 떨었던 적도 있었던 사람이 본인을 인터뷰하겠다고 하니까 '감히 청력도 안 좋은 네가 나를 인터뷰 해?'라는 식의 반응을 보인 것에 여전히 모멸감을 느낀다. 그 일을 겪고 며칠 동안 잠을 못 자며 분노했고,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장애를 모른다
아찔했던 또 하나의 사례는 3년 전에 있었다.
나이는 들어가고 청력도 좋지 않아 사회복지사라는 자격증이 있음에도 일자리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선배의 중재로 어렵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서울역 인근의 노숙인 지원센터에서 노숙인의 안전을 살피는 아웃리치(거리상담)를 하는 일이었다. 밤 7시 반부터 밤 10시 반까지 서울역 주변을 돌면서 인근에 있는 노숙인의 안전을 살피고 간단한 상담을 하는 일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니까 2인 1조를 원칙으로 하고 움직인다.
매일 순찰을 도는 지역이 바뀐다. 아웃리치 상담원이 오늘 순찰 돌 지역은 노숙인지원센터 직원이 정해준다. 그날은 용산역 인근의 노숙인 텐트촌으로 정해졌다. 텐트촌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안부를 확인하고 간단한 상담을 하려면 사람의 얼굴을 봐야 하는데 깜깜한 밤이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나는 웬만하면 텐트촌으로 가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직원은 나를 그곳으로 배치했다. 캄캄해서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어 상담하기가 곤란하니 나를 다른 곳으로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직원은 나의 요청을 거부했다.
캄캄한 텐트촌에 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했다. 그럼에도 내가 갈 지역을 바꿔주지 않는 직원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가진 장애를 배려받지 못한 것 같아서 화가 났고, 엄연한 차별이라고 느꼈다. 어떤 말로도 설득이 되지 않았고 직원은 상담 지역을 바꿔줄 수 없다며 고집을 부렸다. 허탈했다. 며칠 후, 결국 3시간짜리 그 일을 그만두었다.
다음은 흔히 겪는 일이다.
복지카드를 제시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복지카드가 있으면 고속도로 통행료가 50% 감면된다. 얼마 전에 내 복지카드 유효기간이 만료되어서 더 이상 고속도로 통행료 감면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새로 발급받으려면 주민센터에 방문해 새 복지카드를 만들어야 한다. 주민센터에 방문해서 사정을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코로나 시국이 아닌가. 어느 한 사람도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은 없다. 마스크는 나에게 소통을 가로막는 치명적인 덫이다. 복지카드를 재발급받는 사소한 민원을 처리하러 간 주민센터에서는 내 사정을 알 리가 없다. 사정을 얘기해도 마스크를 잠깐 내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마스크 벗고 말하다 코로나에 걸리면 책임을 나에게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다면 어떤 대안이 있을까. 바로 필담이다. 필담은 종이에 글로 써서 소통하는 방법이다. 담당 직원에게 종이에 써서 말해 달라고 했다. 그럼에도 글로 쓰지 않고 마스크도 내리지 않고 말하는 직원을 보며 나는 절망했다. 이 사람은 장애감수성이 정말 없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주민센터의 모든 직원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민원인을 상대하는 주민센터의 직원이라면 최소한의 장애 감수성을 갖는 것은 당연한 거니까. 그날 나는 일을 처리하기 위해 외국도 아닌 국내에서 보디랭귀지를 하며 의사소통을 하는 웃지 못할 촌극을 벌였다.
27년 전엔 이런 일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장애인인권운동단체에서 일했다. 그때만 해도 장애인단체는 열악했다. 정부지원은커녕 후원금 모으기도 벅찼다. 상근 활동가들은 활동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일했다. 활동가 대부분은 지체장애인 당사자였다. 당시만 해도 장애인의 이동권 싸움은 가장 비중이 컸다.
많은 활동가 중에 청각장애인 활동가는 나 혼자뿐이었다. 청각장애인은 장애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청각장애가 있다고 말하기 전에는 장애인인지 아닌지 잘 모른다. 동료 활동가가 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청각장애인이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비장애인처럼 보인다. 그래서 거리감이 생긴다."
장애인 운동판에서도 '패'가 나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힘을 모아서 장애인 이동권 문제와 장애인 인권 보장 문제를 가지고 싸워도 모자랄 때에 '너는 청각장애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장애와 달라서 괴리감이 든다'는 말은 의도적으로 한 말이 아니었음에도 나를 혐오하는 것처럼 들렸다.
얼마 전에는 한 지인이 내게 "당신은 남이 하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했다. 보통 사람보다 취약한 청력을 갖고 있기에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이 하는 말을 다 듣기에는 한계가 있다. 사적인 자리마저 나의 장애를 온전히 배려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잘 듣지 않는다'는 말에는 나의 예의 없음을 탓하는 것과 동시에 '너와 대화하기 싫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 말은 나의 취약한 청력을 말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판단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취약한 청력으로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들으려고 했는데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이처럼 차별과 혐오가 내재되어 있는 상황을 마주할 때 나는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할지 막막하다. 나 역시 언제 어디서 이런 실수를 할지 모르니 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렇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판을 만드는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