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진 환국 이후 1945년 12월 6일 경교장 앞에서 임시정부 각료들을 촬영한 것으로 배경으로 경교장의 기둥이 보이고 있다. 이 사진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환국 후 청사였음을 알 수 있다. 앞 줄 왼쪽부터 장건산, 조완구, 이시영, 김구,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조선환. 둘째줄 황학수, 김성숙, 유림, 김봉준, 유동열, 최동오, 셋째줄 유진동, 성주식, 김상덕, 조경한, 김원봉.
서울시제공
김구가 비타협적 혁명가라면 신익희는 혁명가적 기질과 정치가적 역량을 구비한 현실론자에 속한다.
해방공간, 남북한에 미ㆍ소의 군대가 주둔한 상태에서 김구의 임정계열 주류는 시종 반탁ㆍ통일정부 수립론을 주창하였다. 이에 비해 신익희는 한반도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풀고자하는 보다 현실론의 입장이었다.
하지 사령관은 1946년 10월 미군정의 자문기관으로 설치했던 남조선과도민주의원을 입법의원으로 개편하여, 입법의원의 절반은 자신이 임명하고 절반은 민선토록하였다. 신익희는 서울에서 입법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듬해(1947년) 1월 20일 개원한 입법의원은 좌우합작을 추진해온 하지 사령관의 의도대로 좌우합작파인 김규식을 의장으로 선출했으나 뒤이은 회의에서 신익희가 '반탁결의안'을 긴급발의, 통과시켰다. 입법의원을 자신의 어용기구처럼 활용하려던 하지의 의도가 복병을 만나 어긋나게 된 것이다.
그런 한편 남한 단정론이 굳혀져가면서 신익희는 현 상황에서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허상이라고 주장하고 점차 이승만의 단정론에 기울어져갔다. 1948년 2월에는 '유엔소총회'를 앞두고 입법의원에서 의원발의를 통해 "가능지역에서 총선거 실시를 요구하는 긴급 동의안'을 제안, 김규식 의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과시켜 유엔에 전달하였다. 이와 관련 김규식이 의장직을 사퇴하면서 신익희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와 같은 '현실참여론'으로 단정불가와 남북협상론의 김구ㆍ김규식과 노선상의 결별을 하고 독자노선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충칭에 남겨놓고 온 부인과 아들ㆍ딸이 1946년 봄에 귀국했다. 독립운동가 가족들은 한구(漢口)를 거쳐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 화물차에 실려 40여 시간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7세 때 어머니의 손에 끌려 고국을 떠났던 딸 정완이는 어느덧 30세의 성년이 되었다. 당시 신익희는 임정환국준비위원회에서 마련해준 임시거처인 동대문 낙산장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승만은 돈암장, 김구는 경교장, 김규식은 삼청장, 박헌영은 혜화장에 각각 거처가 정해졌다. 환국준비위원회가 친일재계 인물들에게서 기증받은 집이었다. 신익희는 1년여 만에 가족과 재회한 것이다.
당시 그는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반을 운영하고 국민대학 창립과 〈자유신문〉 사장, 입법의원 활동 등 그야말로 눈코 뜰새 없이 분주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