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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써서 모은 돈으로 건조기를 샀습니다

취미 생활로 노트북에 이어 건조기 구매... <오마이뉴스>가 준 선물

등록 2021.09.13 10:59수정 2021.09.13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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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로 얻은 세탁건조기. 딸 지원이가 축하한다며 특별히 제조회사를 모니카로 그려주었다. ⓒ 박향숙

  
연이틀 세탁기에 빨랫감을 돌리고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누가 보면 생전 처음 본 물건에 신기해하는 어린아이처럼 세탁건조기를 눌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20여 년 전 결혼 때 산 전자제품, 대부분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살림 구두쇠인 내가 뜬금없이 세탁건조기를 샀다 하니, 남편과 아이들이 화들짝 놀랐다.


지난 2020년, 처음으로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쓰는 시민기자가 된 후 글쓰기만으로 결과를 얻는 목표를 세웠다. 첫 번째가 노트북 마련이었다. 일일이 데스크톱 컴퓨터를 사용하자니 밤늦게까지 일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물론 현대사회가 할부 인생이니 신용카드로 사서 쓸 수도 있었지만, 왠지 글을 써서 적립된 돈으로 노트북을 사는 열정을 보이고 싶었다. 적립금의 일등 효자는 <오마이뉴스>였고, 올 1월에 산 노트북으로 지금도 이 글을 쓴다.

올해의 목표는 세탁건조기 구매였다. 여러 가지 잡다한 일상으로 바쁜 와중에도, 글을 써서 소소한 공모에 응했다. 지역에서 행사하는 글쓰기 공모 몇 가지를 포함하여 상반기 <오마이뉴스> 기사 채택 원고료까지 합하니, 어느새 세탁건조기를 살만한 돈이 저축되었다.

9월이 되어 휴학한 딸이 내려오고, 비대면 수업 중인 아들까지 집에 있다 보니 갑자기 세탁물이 늘어났다. 날이 서늘해지면서 빨랫감의 마르기 속도가 더뎌지자 건조기를 사라는 지인들의 말이 생각났다. 지금이 딱 필요할 때다 싶어서 친구에게 가성비 최고인 상품을 추천하라 했다. 절대 비싼 거 안 되고, 고장 없는 거, 적당한 용량을 물었다.
  
인터넷으로 추천받은 상품을 검색해서 과감히 주문 표시를 눌렀다. 사진을 찍어서 동네방네 건조기 구매했다고 알렸다. 정말 잘했다고, 살림하면서 가장 좋은 느낌일 거라고 말해줬다. 물건이 오는 날 아침, 가을배추와 무를 심어야 한다고 남편이 말했다.

그제야 건조기가 온다고 말하면서 내가 글만 써서 장만하는 살림이라고, 세상에 나 같은 사람 흔하지 않다고 자랑했다. 남편은 딸을 깨워서 밭으로 가고 나는 11년째 사는 집 베란다로 향했다.


베란다에는 세탁기와 김치냉장고밖에 없다. 특별히 청소할 것도 없지만,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작년에 담아둔 몇몇 과일과 야채청들을 내려서 병에 담고, 타일 바닥을 물청소했다. 두어 시간 후에 설치 기사분이 왔다. 중량이 10kg짜리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작았지만, 평소 빨래양을 고려하면 딱 좋은 크기였다.

"선생님, 이 건조기 어떻게 사는 줄 아세요? 제가 글쓰기를 좋아하는데요, 공모전 같은데 내서 모인 돈으로 사는 거예요. 최소 2000원부터 최대 30만 원까지 받았거든요. 웃기죠!"

묻지도 않는 설치기사에게 수다를 떠는 내 모습이 생경했지만, 대응해주는 기사님의 태도는 고객점수 만점을 주고 싶을 정도로 정겨웠다.

"정말 좋은 취미를 가지셨네요. 저도 학생 때는 글 좀 쓴다고 끄적거리기도 했는데, 사는 게 뭔지 요즘은 이런 일만 하고 삽니다. 살림도 장만하고 취미생활도 하고 참 좋네요."

"선생님도 글 한 번씩 써보세요. 오늘 저 같은 사람 얘기도 써 보시고요. 저도 그냥 시답지 않은 일에도 일단 써놓고 나중에 살을 붙이거든요. 많은 힐링이 되더라고요. 이왕이면 상금도 주는 행사를 찾아보고 글을 쓰면 훨씬 더 재미있어요."

기사님은 사용법을 상세히 알려주면서 혹시 빨랫감이 있으면 사용해보라고 했다. 가벼운 이불 두 개를 세탁해놓은 터라, 바로 건조기에 넣었다. 분명 별것도 아닌 줄 알면서도 버튼 하나 누르는 것도 왜 그렇게 떨리는지, 윙윙 소리에 왜 그렇게 놀라는지, 정말 어린 아이가 되었다.

세 시간여가 지나는 동안 곧 있을 의류 바자회에 낼 옷가지들을 정리했다. 바자회를 하다 보면 늘 눈에 걸리는 것 중의 하나가, 이물질이 묻힌 채로 전시되는 물건 들이다. 일부러 그런 것을 낼 리야 없겠지만, 주관하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일이 쌓이는 것임을 안다. 이번 의류는 잘 빨아서 건조기의 후광을 입혀서 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아이들 옷을 골랐다.

마침내 글쓰기가 선물해준 세탁건조기의 첫 번째 작품이 나왔다. 빨래가 다 됐다는 경쾌한 신호음과 내 발소리의 박지는 같았다. 건조기의 문을 여니, 훅하니 퍼져나오는 열기가 말했다.

'이제 만져보시라. 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과하지 않은 여린 온기를 담은 이불을 볼에 대었다. '오호! 바로 이런 느낌이고만. 뽀송뽀송하니, 부드러운 촉감.' 빨래를 하고 나서도 종일 선풍기를 돌려 여름의 습기를 없애가며 말리기를 했던 때가 바로 엊그저께였는데. 이렇게 하루아침에 신천지를 만나는 느낌이라니!

나이가 들수록 문명의 이기가 저절로 당겨진다. 오래된 세탁기도 바꾸고 싶어지고, 집을 둘러보며 20년도 더 된 물건들이 쑥쑥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을 써서 돈 모아 살려면 간이 천 리니 다른 거 아끼고 예쁘고 기능 좋은 신상품 사서 더 늙기 전에 깨끗하게 살림하고 살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난 글을 써서 모은 돈으로 하나하나 살림을 사 가련다.
 

건조기를 사용하여 빨래를 하는 즐거움이 생겨 저절로 이해인 시인의 '빨래를 하십시오'가 떠오릅니다. ⓒ 박향숙

 
다음 날도 빨래를 했다. 이해인 시인의 <빨래를 하십시오>의 시 구절을 떠 올리면서.

우울한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맑은 물이
소리내여 튕겨 울리는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밝아진답니다
(중략)
​누구를 용서하기 힘든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비누가 부서지며 풍기는
향기를 맡으며
마음은 문득 넓어지고
그래서 행복할 거예요.
#세탁건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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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희망은 어디에서 올까요. 무지개 너머에서 올까요. 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임을 알아요. 그것도 바로 내 안에. 내 몸과 오감이 부딪히는 곳곳에 있어요. 비록 여리더라도 한줄기 햇빛이 있는 곳. 작지만 정의의 씨앗이 움트기 하는 곳. 언제라도 부당함을 소리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일상이 주는 행복과 희망 얘기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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