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롱드마고 내부. 전시장 같기도 하고 책방 같기도 하고, 굿즈 상점 같기도 하고 실크스크린을 비롯한 체험 공방 같기도 하고 찻집 같기도 하다. 실은 이런 다양한 일을 위해 즐거운 작당을 벌이는 커뮤니티 공간이다.
나익수
"대한민국에 안 가는 남자가 어디 있어"
전북 소도시에서 나고 자란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와 가장 멀리 떨어질 수 있는 곳을 찾다 강원도에 있는 대학을 갔다. 졸업하고 서울과 제주도에서 반성매매 단체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대학교 4학년 때 학교에 일이 있었어요. 총학생회장하고 단과대 학생회장들하고 교직원들이 룸살롱에 갔다가 걸렸죠. 등록금 벌려고 웨이터 하던 한 남학생 눈에 띄어 알려졌는데, 총학생회장이 제 친구의 남자 친구였거든요. 그 사실이 소문이 나서 알게 됐지요. 왜 갔냐 했더니, 등록금 투쟁 기간에 인상률 조정을 위한 회의를 하고 뒤풀이를 간 거래요. 충격을 받았죠.
'총학생회장이 그런 곳에 갔다니 문제가 있다, 학생들한테 사과하고 사퇴를 하라.' 이렇게 저희 동아리 차원에서 요구를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이 일로 대자보를 붙이는데, 지나가던 남학생들이 욕하면서 찢어요. '○○년들아!' 이러면서. 또 제 눈앞에서 '대한민국에 안 가는 남자가 어디 있어! 남자라면 당연한 거지.' 이러면서 대자보를 찢는 거예요."
이때가 2004년쯤이다. 얘기를 듣는 순간, 지난 2000년 광주 5.18 추모제 때 민주당 386초·재선 의원들이 룸살롱에서 여종업원을 불러 술판을 벌인 사건이 떠올랐다. 그 시기에 이유진씨는 남학생들이 방석집(성매매 업소)에 가기 위해 계를 붓기도 하고, 입대를 앞둔 남자 후배에게 선배들이 총각 딱지 떼라고 성매매 업소에 보내 준다는 이야기도 들으며 성매매(성구매가 맞는지도 모르겠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굉장히 밀착되어 있음을 알았다고 한다.
여성주의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이유진씨는 이때 성매매에 대해 문제의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침 2004년 '성매매 방지법'이 제정되어, 정부에서 성매매 방지 상담원을 양성하던 때였다. 성매매 피해자들을 상담하고 지원하는 상담소와 쉼터에서 일할 상담원을 모집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졸업하고 그쪽으로 갔다고 한다. 그 일을 4년을 했다.
4년 동안의 성매매 피해자들 상담 활동이 이유진씨에게도 트라우마가 되었다. 상담 내용이 대부분 극단적인 폭력 피해였다. 성폭력은 빠지지 않고, 쉼터에서 일할 때는 자해나 자살을 목격하기도 했다. 방문 상담을 갈 때 혼자 죽어 있는 피해자 언니를 비롯해 가해자를 찾을 수 없는 죽음, 업소에서 손님에게 당하는 죽음… 이런 일을 일상에서 본다는 게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돌이켜보니 당시에 악몽을 많이 꾸었다고 한다. 결국 갑상선암 수술을 받고 우울증을 앓았다. 자살 충동도 심해져, 상담을 통해 마음을 돌보고자 단체 일도 그만두었다. 부모님마저 헤어져 가족이 해체되면서 진짜 회복이 필요해졌다. 몇 달 오대산 월정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도망치듯 간 시골살이
회복을 위해 간 절에서 남편을 만났다. 종무원으로 일하던 남편은 대학 때 공부만 하던 모범생이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불교에 관한 책을 읽고 관심이 생겨 단기 출가학교에 들어갔다. 스님이 될까 하다 포기하고 종무원으로 남아 이유진씨를 만나게 되었다. 절에서 둘은 서로 얘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나 보다. 아니면 서로 호감이 있어서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겠다 싶기도 하다.
"절에서 같이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얘기를 하는데, 둘 다 도시에서 살고 싶지 않고 약간 자급자족에 대한 로망 같은 게 있었어요. 마침 친구들이 귀농 공동체를 한다고 하니까 가 보자 그래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쉽게 갔죠. 생태주의나 농사에 대해서 진짜 1도 모르고. 약간 도망치는 심정으로 간 것 같아요."
몇 달 귀농 공동체 생활을 하다 친구들은 나중에 흩어졌다. 결국 둘만 결혼해서 남게 됐다고 한다. 어떻게 결혼할 생각을 했을까?
"그냥 연애 1년 하고. 저는 결혼 생각은 별로 없었고 그냥 같이 있고 싶은데, 남편은 곧 죽어도 결혼을 해야겠대요. 그래? 그럼 해 보지 뭐 이렇게 했죠. 저는 결혼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이런 마음이었죠."
농사는 영 아니었나 보다. 로망은 있었지만 적응하느라 애쓰기도 했단다. 농사로 한 달에 50만 원도 못 벌었는데, 둘이 겨울에 마트 계산원과 가스 배달을 하며 300만 원씩 벌어 모았다. 모은 돈으로 비닐하우스를 크게 했는데, 어느 날 큰바람에 대가 뽑히고 비닐이 찢어지면서 다 접고 말았다.
농사를 접고 생계를 위해 학원 강사를 비롯해 닥치는 대로 알바를 했다. 이러려고 시골 온 게 아닌데 하며 회의감에 빠졌다. 그때 남원 산내에 가 있던 동료가 놀러 오라 해서 갔다가 동네에 반해 빈집 구해 바로 이사 왔다고 한다.
재미없으면 그만둬야지
이유진씨는 산내로 이사 와서 10달 정도 '한생명'이라는 단체에서 일하다 이듬해에 '문화기획달'이라는 비영리 단체를 만들고, 계간지 <지글스>를 창간했다. '글 쓰고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지글스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학창 시절에는 작가가 꿈이었고, 대학 때는 잡지사에 들어가고 싶어 하기도 했다. 물론 생계를 위해 방과후교사 등 여러 일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