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신익희 후보 유세차
국가기록원
자유당이 풍족한 선거비용과 경찰 등 관의 비호를 받으면서 거미줄과 같은 지방조직을 갖춘데 비해 신생정당 민주당은 후보의 유세 외에 별로 선거운동의 방법이 없었다. 대통령후보 신익희와 부통령후보 장면은 권역별로 나누어 또는 함께 강연회를 열었다.
4월 11일 신익희의 첫 유세가 서울 수송국민(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3만여 명의 청중이 모여 정견을 듣고 환호하였다. 날로 인기가 치솟아 유세장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이반현상으로 신익희를 더욱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구 수성천의 민주당 정ㆍ부통령후보 합동정견 발표장에는 2만의 청중이 몰려 성황을 이루었다. 연설이 끝난 뒤 대구 유지들의 간담회에서 신익희는 공약을 밝혔다.
청주에서는 시에서 강연회장을 빌려주지 않아 우중인데도 무심천변에 임시강연회를 열기로 했다. 길목에는 정사복 경찰이 진을 치고 방해를 했지만 우산을 든 시민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신익희는 시민들의 이러한 성원에 감복하여 우산도 쓰지 않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연단에 올랐다.
정권은 마땅히 평화적으로 교체되어야만 합니다. 미천한 본인을 지지해 비바람을 무릅쓰고 모이신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소신껏 투표를 하리라 믿습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듯이 아무리 관이 탄압이 극심해도 우리가 제 정신으로 투표에 참여한다면, 민주주의는 기필코 승리하고야 말 것입니다.(『해공 신익희선생 연설집』)
신익희 후보를 지지하는 민심은 경향이 다르지 않았다. 가는 곳 마다 환호가 일었고 투표일이 가까워지면서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 아래 일당 독재를 타도하자는 해공의 사자후는 국민들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받았고, 그의 인기는 하늘 드높이 치솟기만 했다. 해공과 운석의 초상화가 나붙은 선거 사무실에는 시골 아낙네들과 군인들까지도 몰려와 해공의 팜플렛과 사진을 요구하는 등 눈물겨운 정경은 연일 끊일 줄 몰랐다.
이제 대세는 완전히 해공에게 기울었고, 8년간이나 집권한 이 정권의 1인 체제는 바야흐로 종언을 고하는 듯 했다. 그러한 분위기는 선거 유세의 중반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더욱 백열화되어, 1956년 5월 3일 한강 백사장 정견 발표회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주석 1)
강가로 소를 끌어갈 수는 있지만 강제로 소에게 물을 먹게 하기는 어렵다. 이미 민심이 떠난 자유당 정권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무리수를 거듭했다.
드디어 선거에 돌입하게 되는데, 이 선거에서 바람이 불었어요. 그 바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서울 탑골공원 근처에 마이크를 달았는데, 야당 마이크 소리는 서로 들으려고 하는 반면 여당 마이크 소리는 안 들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당이 자기 마이크를 특별히 크게 틀어놓아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서울에서 세 당이 합동으로 찬조연설을 했어요. 민주당과 진보당은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았어요. 하지만 자유당 쪽에서 나온 대표가 일어서면 "우~"하는 거예요. 명동에 있는 시공관에선가 그랬는데, 청중들의 "우~"하는 야유와 함성 때문에 제대로 연설을 못하고 내려갔어요.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주석 2)
주석
1> 유치송, 앞의 책, 737쪽.
2> 서중석, 앞의 책, 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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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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