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원 류시태의 묘. 경북 군위군 군위읍 야산에 자리해 있다.
김종훈
지난 14일, 기자는 경상북도 군위군 외량리 일대에 자리한 서애 류성룡 선생 조부의 묘를 무작정 찾아 나섰다. 막막했지만, 그곳에 가면 의열단원 류시태와 관련된 정보를 무엇이든 얻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2017년 류시태 선생의 동지 김시현 선생의 묘를 찾아 '묘비가 없다'는 사실을 온라인 상에 알린 홍순두 충북교육청 장학관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기자에게 "류시태 선생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형이자 풍기군수를 지낸 겸암 류운룡 선생의 후손"이라면서 "풍산류씨 후손들에게도 확인해 보니 류시태 선생의 자손들은 외국에 거주하지만 류성룡 선생 조부 묘 인근에 류시태 선생의 묘가 모셔진 게 맞다"라고 말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외량리 산 10번지에서 수풀을 헤치고 모기에 뜯기며 수시간 동안 헤매다가 '후암의사 풍산류공 시태지묘(后菴義士 豐山柳公 時泰之墓)'라고 새겨진 작은 비석을 품은 의열단원 류시태의 묘를 발견했다. 1965년 2월 17일 일흔다섯의 나이로 사망한 류시태의 묘가 처음으로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고생 끝에 찾은 의열단원 류시태의 묘는 초라했다. 10월 중순임에도 떼 하나 제대로 서지 않아 메말라버린 흙이 내려앉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선생에게 약식이나마 인사를 올린 뒤 미리 준비한 종이컵에 술 두 잔을 가득 담아 무덤 앞 작은 비석 위에 올렸다. 바로 옆에 의열단원 김시현 선생의 사진도 함께 놓았다. 두 사람은 거사 전날인 1952년 6월 24일 저녁 부산 영도의 하숙집 근처에 모여 마지막 술잔을 함께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69년이 지났지만 이렇게라도 다시 한번 두 사람이 함께 술잔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해 드리고 싶었다.
고향이 같은 김시현과 류시태는 일제강점기 내내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다. 김시현이 1883년에 태어났고, 류시태가 7년 뒤인 1890년에 태어났다. 두 사람 모두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 일제강점기 내내 일제에 맞서 목숨 걸고 싸웠다. 김시현은 1945년 광복까지 26년 동안 독립운동을 이어가며 일곱 차례나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무려 16년을 감옥에서 보냈다(관련 기사 :
묘비도 없는 '밀정' 주인공 김시현 묘... 그는 왜 서훈 못 받았나 http://omn.kr/1v479).
<독립운동사료집>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류시태 역시 1919년 3.1운동 때 독립운동에 투신한 뒤 1921년 의열단에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23년 2월에는 동지들과 함께 의병투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서울 내자동에 살던 부호 이인희에게 찾아가 5000원을 요구하는 등 세 차례에 걸쳐 독립자금 출연을 강요하다 잠복중이던 일본경찰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 일로 류시태는 1923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1931년에는 일제를 비장한 죄로 다시 잡혀 1년간 복역했다. 이후엔 일제강점기 당시 선생과 관련된 특별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해방 후에도 의열단원들과의 활동을 꾸준히 이어간 것으로 볼 때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독립운동의 끈을 놓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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