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아내와 산책 후 찾은 어느 카페
정지현
열심히 일하는 동안 2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아쉽게도 이젠 일 했던 날보다 일 할 날이 적을 것이다.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퇴사하고 이직하는 곳으로 바로 출근을 계획했다. 늘 그래 왔었던 것처럼. 가장으로서 스스로에게 선을 긋고, 숙명처럼 받아들인 책임감 같은 거였다.
내가 잠깐 일을 쉬거나, 아예 일을 하지 않는다는 상상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일을 쉬는 시간만큼 수입이 없는 공백은 쉽게 상상하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이런 사고를 하기 전에 내 몸과 마음은 당연히 일을 해야 하고, 당연히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의무감에 중단 없는 직장생활을 이어가려고 했었다.
이번에 찾아온 퇴사와 이직도 처음 내게는 그런 마음이었다. 하지만 전 직장 인사팀 동료의 권유와 이직하는 회사의 대표님의 이해로 생각지도 못한 행복한 시간이 생겼다. 사용하지 않은 연차 휴가를 적절히 활용하여 퇴사일과 입사일을 조정했다.
이런 결과로 21년 사회생활에서 처음으로 아주 무료하지만 행복한 2주일의 짧지 않은 휴식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됐다. 하루하루가 너무도 무료하지만 그 무료하고, 지루함이 너무도 행복한 시간을 누리고 있다.
며칠 전에는 출근길 대신 아침 산책길을 나서봤다. 경의선 숲길을 따라 일산역에서 백마역까지 기분 좋게 걸었다. 아침 공기는 찼지만 여기저기 시선을 두며 떼는 내 발걸음에 어느덧 숨은 조금씩 가빠왔고, 땀이 이마에 조금 맺힐 때쯤 어느새 백마역에 도착해 있었다. 지하철 역에는 출근길을 나서는 사람들이 붐볐고, 불과 며칠 전까지 내 모습이었을 텐데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딱히 시간에 쫓기는 하루는 아니었지만 나름 그 하루에서도 사소한 계획이나 할 일들은 늘 있었다. 처음 하루, 이틀은 아이들을 깨워서 학교를 보내고, 텃밭 일이 있는 아내를 대신해 아침을 챙기고, 설거지 등 집안일을 하는 하루를 보냈다. 늘 저녁을 해놓고 기다리던 아내를 대신해 요 며칠은 내가 저녁 준비도 해봤다.
첫날과 이튿날은 미뤄왔던 드라마를 시청했다. 동생에게서 받은 넷플릭스 계정으로 <시그널>이라는 드라마 때문에 팬이 된 김은희 작가의 <킹덤> 시즌 1, 2를 몰아서 봤다. 아침 식사 후에는 근처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포장해서 집에 돌아오는 일상을 반복했다. 남는 게 시간인 내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귀찮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내와 북한산 둘레길을 찾기도 했다. 조금은 이른 단풍 산책이었지만 오랜만에 둘이서 데이트를 나온 기분에 아내와 난 처음 간 북한산 길보다 둘만의 가을 산책에 더 집중하며 시간을 보냈다. 4Km도 되지 않는 짧은 산책길이었지만 평일에 즐기는 여유와 주고받는 대화가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행복한 길이었다.
둘이서 사진도 찍고, 산책길을 내려와 맛있는 만찬도 즐겼다. 국립공원 등산로에 있는 식당들이 가격은 다 조금씩 나갔지만 오늘 보낸 시간을 생각하며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코로나로 인해 외출을 많이 자제했는데 평일 북한산 둘레길은 조용하고, 평온했다.
고즈넉한 풍경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깎아지른 북한산 절벽 산새에 그 웅장하게 보이는 몇 개의 봉우리도 싫지 않았다. 마스크 사이로 들어오는 숲 속 공기에 취해, 아직은 가을 풍경이라고 하기에는 아쉽지만 조금씩 갈아입는 가을 풍경이 마음 한 가득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