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대. 왼쪽 아래에 남강이 흐르고 있다.
장호철
조선 관군은 화차와 현자총통을 비롯한 총포와 화살로 백성은 돌과 뜨거운 물로 맞선 가운데, 성 밖에서는 곽재우와 최경회의 의병이 왜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왜군은 결국 이레 만인 11월 13일 진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호남에 진출하려던 왜군의 계획을 꺾은 이 1차 진주성 전투가 한산대첩·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삼대 대첩을 이루는 진주대첩이다.
진주대첩과 2차 진주성 전투로 죽어간 7만 원혼
그러나 승리를 눈앞에 두고 진주목사 김시민은 11월 12일 왜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다음날 왜군은 퇴각했지만, 그는 11월 21일, 39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 '충무'가 내려졌다.
그가 죽음으로 지킨 진주성은 그러나, 이듬해 7월 이레간 벌어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10만 왜군에 무너졌다. 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성 안에 남은 군·관·민 7만 명을 사창(司倉)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 이때 산화한 순국 선인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 성 안에 있는 진주 창열사(彰烈祠)다.
진주성은 임진왜란의 영욕을 감당해야 했던 아픈 한국사다. 성 함락 한 달 뒤에 왜군이 촉석루에서 연회를 벌일 때 주논개(朱論介, 1574~1593)가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했다. 뒷날 그의 애국충정을 기려 사당 의기사(義妓祀)가 촉석루 옆에 세워졌다.
이왕 진주에 온 거, 구경이나 하고 가자고 나선 진주성 돌아보기는 영남 포정사(布政司)를 지나 성벽을 따라 성 둘레를 돌면서 반전했다. 우리는 무심히 찾은 진주성이 자신의 내밀한 속살을 우리에게 천천히 드러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단풍이 곱게 든 성안의 나무와 숲이 뿜어내는 만추의 향기가 너무 강렬했다. 맑고 섬세한 햇살이 숲과 성벽의 넓적한 옥개석 위로 부서져 내렸고, 느티나무 잎사귀에 머무는 햇살은 반짝반짝 빛을 냈다.
무엇보다도 성 안의 시설물과 곱게 물들어가고 있는 숲이 살갑게 어우러져 있었다. 나무와 숲, 그리고 건물은 마치 정다운 이웃처럼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성벽 둘레를 따라가면 북문의 지휘대인 북장대(北將臺), 복원된 진주성 포진지인 포루(砲壘), 서장대 등이 이어지는데, 서장대 저편으로 새파란 남강이 흐르고 있었다.
진주성이 성의 남쪽을 강으로 둔 것은 적잖은 강점이었을 것이다. 진주대첩 당시에 성 밖의 의병 등과 군사 신호로 풍등을 날리고 횃불과 함께 남강에 등불을 띄웠는데, 이것이 남강 유등(流燈)의 기원이다. 올 12월에 개막하는 남강 유등축제는 진주성에서 순절한 7만 병사와 사민의 넋을 기리는 행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