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형도 조감井자 모양으로 지어진 조선은행 본점의 모형. 남대문로 일대가 모형으로 재현되어 있는 부분임.
이영천(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
이용익은 이의 타계 책으로 대규모 차관도입을 구상한다. 자본력을 키워 중앙은행 설립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플랑시 중개로 프랑스계 홍콩은행과 차관도입을 교섭하나 신통치 못하다.
이 교섭은 1900년 5월 운남(雲南)신디게이트(영·불 자본가가 중국 운남성 광산채굴을 위해 1896년 설립)의 대표인 프랑스 자본가 카잘리스(Cazalis) 방한으로 급진전 되어, 이듬해 4월 평양 탄광채굴권을 포함, 6개 조항으로 은화 500만 원 차관 도입계약이 성사된다. 한국의 해관(海關)세입이 담보다. 고종은 뒤이어 영국인 총세무사 브라운을 해고해 버린다.
이에 열강들 압력이 거세진다. 화들짝 놀란 영국은 인천에 군함을 띄워 무력 시위를 벌인다. 일본도 자국 제일은행 업무인 해관 운영에 위협 요인으로 여긴다. 미국과 러시아도 해관세(海關稅)를 담보로 하는 차관도입에 반대한다. 궁극적으로 모두가 프랑스 진출과 세력 확장을 염려한 것이다. 대한제국 내부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커진다.
결국 정부는 1902년 2월 운남신디게이트에 차관도입 거부를 선언해야만 했다. 궁지로 내몰린 처지에 심각한 부작용 우려에도 불구하고, 할 수 없이 백동화 주조를 더욱 늘려가는 수밖엔 도리가 없었다.
중앙은행 설립 시도
백동화 인플레이션은 심각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국가자본 축적에 큰 몫을 담당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용익은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중앙은행' 설립을 도모한다. 1903년 3월 '중앙은행조례'와 '태환금권(兌換金券, 금화나 금괴로 교환할 수 있도록 중앙은행이 발행한 지폐)조례'를 반포한다.
총자본금 300만 환(圜)의 중앙은행은, 해관세를 포함한 모든 세금과 국고금 수납을 담당하며 태환금권의 발행을 전담케 한다는 구상이다. 태환금권은 1환·5환·10환·50환·100환 등 5가지다.
이용익은 금괴 3만 개를 내장원(內藏院)으로 운반한다. 은행 본점을 남대문로 부근 옛 사자청(寫字廳) 자리로 정하고, 지소는 각 도(道)에 둔다는 방침이다. 보유 금화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태환금권 발행이 남발되면 백동화보다 더 큰 부작용이 생긴다는 내부 지적과 비판에도, 계획은 추진된다.
1903년 12월 전환국은 120만 원의 금괴를 확보하고 50전(半圓) 은화 150만 원 상당을 주조했으며, 1904년 4월엔 태환금권 및 백동화 어음의 인쇄도 시작한다. 그해 11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전환국이 폐쇄되기 전까지 주조나 저장한 화폐, 금, 은, 지금(地金, 제품으로 만들거나 세공하지 않은 황금) 총액을 추산하면 약 460만 환이다. 여기에 미포함된 화폐 액수 등을 고려해 보면 광무 정권은 중앙은행 설립을 통한 경제개혁에 충분한 자본력을 확보했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