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7월 31 경향신문 1면에 발표된 진도간첩단 사건 전체 내용
경향신문
1981. 7. 31.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는 언론을 통해 "24년 동안 전남 진도지역을 중심으로 암약해 온 고정간첩 일당 7명을 검거. 이 고정간첩망은 해방직후부터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다가 6.25때 서울에서 우익 인사 등을 학살한 후 북괴의용군에 입대, 자진 월북한 진도군 출신 박영준(60세)이 대남간첩으로 선발돼 1957년 5월부터 1976년 10월 까지 6차례에 걸쳐 고향인 진도에 침투하여 조직"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국정원이 자체 과거사위원회 진상조사를 통해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당시 안기부에 연행되어 조사받은 인원은 모두 13명이다. 이들은 1981년 3월 9일에서 5월 12일경까지 연행되었고, 길게는 약 2달가량 영장 없이 불법 조사받은 피해자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학원간첩편(Ⅵ) 국정원)
당시 사건 발표에 따르면, 이 사건의 핵심 피의자였던 박동운의 범죄 혐의는 여러 개 있었는데, 특히 중요한 범죄 사실은 간첩혐의였다. 그리고 그 간첩혐의를 수행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국정원이 증거로 내놓은 것이 바로 라디오와 진도농협의 대차대조표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증거는 모두 조작된 것이었다. 박씨는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조사를 통해 당시 국정원에서 제시한 증거가 엉터리였다고 주장했다.
(라디오 관련해서) 재판과정에서도 (내가 간첩이라는) 증거가 없었고, (무전기를) 부쉈다는 망치, 그것도 망치머리도 없는 자귀(망치의 손잡이)하고, 헌 라디오가 나온 것인데 자귀는 외할아버지가 연장으로 쓰던 거였고, (중략) 또 1979년 진도농협 대차대조표 등을 본인이 전자복사기로 복사해서 (북한공작원에게) 줬다고 했는데, 당시 진도농협에는 복사기가 없었고 묵지를 사용하던 시절이다. 재심청구시 원복(당시 진도농협에 복사기가 없음을 증명해주는 서류)를 제출할 것이다.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학원간첩편(Ⅵ) 국정원)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박씨를 비롯해 그와 함께 재판을 받았던 이들은 1981년 당시 재판에서도 국정원의 불법적 수사가 있었음을 주장했다.
변호인 박종창
피고인 박동운에게
문 : 기록에 편철된 1981. 6. 9자의 반성문은 어떻게 하여 쓰게 되었나요.
답 : 검사님이 그 전에 안전기획부에서 썼던 1981. 5. 19자의 반성문을 그대로 읽어주기도 하고, 보고 베끼라고 해서 그대로 보고 쓴 것뿐이고 안전기획부 과장이라는 사람이 괜히 고생하지 말고 부인할 생각도 말고 순순히 시인해라, 그러면 10년 정도 살면 될 것이라고 해서 그대로 시인하고 말았습니다.(서울지법 제5차 공판조서, 공판기록 502~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