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쇼는 레드 와인에 오렌지·레몬 등 과일과 계피·정향 등 향신료를 넣고 끓여 따뜻하게 마시는 음료이다.
전윤정
겨울 유럽 크리스마스 축제나 시장에 가면 뱅쇼를 종이컵에 담아 파는 포장마차가 흔한데, 한 손에는 뱅쇼(vin chaud), 다른 한 손에는 크레이프 누텔라(crepe nutella)를 들고 크리스마스 시장 돌아다니기는 프랑스 사람들이 사랑하는 겨울 풍경이라 한다. 고운 붉은 빛과 따뜻한 뱅쇼는 사람들의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녹여주는 훈훈한 음료가 아닐까.
2년 전 이맘 때즈음 있었던 글쓰기 모임 연말 파티가 생각난다. 저마다 와인을 하나씩 가져오니 와인이 너무 많았다. 먼저 도착한 이가 뱅쇼를 끓이면 좋겠다고 단톡방에 올렸다. 뒤늦게 가는 어떤 이는 과일을, 어떤 이는 향신료를 가져왔다. 우리는 커다란 냄비에 가져온 재료를 모두 넣고 보글보글 끓여서 뱅쇼를 만들었다. 그 자리에서 국자로 한 잔씩 떠서 뜨끈하게 한 잔씩 나눠마셨다.
지혜로운 스님이 빈 냄비에 돌맹이만 넣고 '돌맹이국'을 끓이겠다고 하니, 동네 사람들이 채소와 고기 등을 한 가지씩 가져와 넣어서 결국 모두 맛있는 국을 먹었다는 옛이야기가 생각나는 온온(溫溫)한 시간이었다. 한두 달 뒤 코로나19가 발생해 이렇게 모이는 일이 오래 불가능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코로나19로 인해 지난 겨울 프랑스에서는 '뱅쇼'의 판매량 급증했다고 한다. 프랑스 미디어 더로컬(thelocal.fr)의 보도에 따르면, 포장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추위를 피하기 위해 따뜻한 뱅쇼를 마시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힘든 시기에 뱅쇼는 파리 시민들에게 위안이 되고 있다"라는 인터뷰도 함께 실렸다.
달큰한 향이 온 집안에
오늘 뱅쇼를 끓여본다. 스칸디나비아식, 프랑스 알자스식, 스페인식…… 인터넷에 뱅쇼를 만드는 방법은 많지만, 나만의 레시피는 이렇다.
오렌지와 레몬, 사과 하나씩 굵은 소금으로 깨끗이 씻고, 동그란 모양을 살려 얇게 썬다. 냄비에 썰어놓은 과일과 계피 두 개, 팔각 한 두개, 정향 서너 개, 생강 한쪽을 넣는다. 와인 한 병을 콸콸 붓는다. 빈 와인 병에 다시 물을 반만 받아 넣는다. 설탕도 100g 정도 넣으면 달콤한 맛도 함께 즐길 수 있다. 뚜껑을 열고 부르르 끓어오르면 약한 불로 20분간 뭉근히 끓인다.
달큰한 향이 온 집안에 퍼진다. 맛있게 만들어진 뱅쇼 냄비 안에 여러 재료가 어우러진 것을 보니 올 한해 있었던 이런저런 일이 생각난다. 나에겐 특별한 한 해였다. 첫 책을 내고 라디오 방송, 도서관 강의 등 상상하지 못한 경험을 했다. 하지만 해를 넘긴 코로나의 여파 속에 여전히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남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 대신 집에서 청춘을 삭히고 있는 대학생 두 딸과 집안에서 내내 복닥거렸고, 이직하느라 집에서 함께 지낸 시간이 길었던 남편에게서 50대 중년 남성의 심리적 불안감과 피로감을 엿보았다. 덕분에 남편과 반려견 산책을 자주 하며 대화를 나누는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술, 과일, 향신료라는 다양한 재료들이 모여 뱅쇼의 향기롭고 깊은 맛을 내듯이 기쁘고 슬펐던 우리의 지난 하루하루가 인생을 한층 더 원숙하게 하리라 믿는다. 내년에는 어떤 계획을 세우면 좋을지도 곰곰이 고민해본다. 올해가 가기 전에 따뜻한 뱅쇼 한 잔 마시며 한 해를 정리하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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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세상의 나뭇가지를 물어와 글쓰기로 중년의 빈 둥지를 채워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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