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 묘역 입구에 있는 조광조 신도비조광조 묘역 입구에 있는 문정공 조광조의 신도비이다. 사림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개혁을 펼쳤던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수십년 후엔 사림주도의 정국이 만들어진다.
운민
용인 수지에서 수원 광교로 넘어가는 길 중간, 야트막한 동산에 우리가 주목하지 못한 위대한 인물의 묘가 있다. 포은대로를 지나가는 수많은 차들을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코 그곳을 쌩쌩 지나간다. 조선 중기의 개혁가이자 정치가, 학자인 조광조 선생의 묘가 바로 그곳이다.
이곳은 조광조 선생의 묘뿐만 아니라 그의 일족인 한양 조 씨의 묘가 함께 몰려있다. 그의 증조부를 비롯해 조부, 부모, 아들의 무덤이 있는 가족 묘지인 것이다. 많은 무덤이 있기에 조광조의 무덤을 찾기 좀처럼 어려웠지만 입구에 그려진 묘 위치도를 천천히 대조해보며 능선을 사뿐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묘역 입구에는 문정공 조광조의 신도비가 당당한 자태로 우뚝 솟아 있었다. 총 높이 3미터에 달하는 신도비는 사림이 정권을 잡기 시작한 선조 때 세워졌으며 비문은 노수신이 짓고 이산해가 글씨를 썼다고 전해진다.
예상대로 가장 높은 지점에 조광조 선생과 그의 부인의 묘가 있었고, 그 일대 동네가 훤히 보인다. 묘 앞에 서서 불꽃 같이 살다 간 그의 일생을 돌아본다. 동방사현이라 불리는 김굉필의 밑에서 수학했으며(조광조 역시 동방사현이다)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 학파를 계승하는 사림의 샛별로 거듭난다.
때는 사림을 탄압했던 연산군이 쫓겨나고 반정으로 중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개혁의 요구가 점차 거세져 가던 시기였다. 조광조는 그런 시대의 분위기를 업고, 왕도정치와 유학에 입각한 개혁을 펼쳐갔다. 현량과, 소격서 폐지, 향약 보급이 그런 일환의 하나였다.
하지만 단지 공신을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를 끌어 들었던 중종은 싫증이 났고, 기성 정치세력인 훈구파의 견제도 갈수록 커져만 갔다. 결국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일파는 귀양을 가거나 죽임을 당하는 일명 기묘사화의 풍파에 휩쓸리고 만다. 조광조 본인도 전라남도 능성(화순 능주)에 귀양을 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