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전술의 한국사> 표지
푸른역사
치밀한 계획으로 추진된 회군
1388년 4월 18일, 5만여 명의 요동정벌군이 평양을 출발했다. 5월 7일 위화도에 도착한 이성계는 회군을 결심했다. 당시 이성계는 이른바 '4불가론'을 주장하며 5월 13일과 22일 두 차례에 걸쳐 회군 허가를 요청했다.
사전에 두 차례나 회군을 요청했다는 점에서 기존 사극들에서도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가 처음부터 계획한 쿠데타가 아니라 부득이하게 내린 결단이었던 것처럼 묘사되곤 했다.
그러나 저자는 "사전에 회군을 치밀하게 계획한 정황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성계가 회군 시점으로 삼은 5월 22일에 주목한다.
이성계가 처음 회군 요청을 했던 5월 13일, 양광도(경기·충청) 일대에 왜구들이 침입해오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우왕은 진압을 위해 도성방어군의 주력을 내려보냈다.
그러자 이성계는 1차 회군 허가 요청을 통해 왕경의 상황을 확인하고 도성방어군 주력이 남하하자 22일 재차 회군 요청을 하는 동시에 병력을 급속히 남쪽으로 돌렸다. 저자는 이러한 일련의 행동에 대해 "이성계의 회군 병력이 사전에 이미 회군을 완벽히 준비해두지 않으면 어려운 움직임"이라고 지적한다.
요컨대 사전에 회군을 결심하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이성계가 왜구들을 진압하기 위해 도성방어군의 주력이 남하한 틈을 타 재빠르게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저자는 요동정벌군의 진군과 회군 속도 비교를 통해 "백성들을 배려하며 일부러 천천히 남하했다"(<고려사> 137, 신우 14년 5월 25일)는 기록과 다르게 요동정벌군은 급속도로 남하해 불과 열흘 만에 개경에 당도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에 따르면 요동정벌 당시 평양에서 출발한 군대가 위화도까지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은 20일이었다. 그러나 위화도-개경 구간은 그보다 두 배나 되었음에도 오히려 소요시간은 반이나 줄어든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당시 이성계가 얼마나 마음이 급했는지 알 수 있다. 만약 남하했던 도성방어군이 복귀한다면 회군은 실패로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성계는 왜 기습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굳이 두 차례나 회군 허가를 요청했을까. 이에 대해서도 저자는 회군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종의 '명분 쌓기'로 보았다. 회군은 어쨌든 왕명을 거스르는 일이었으므로 그에 걸맞는 대의명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