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2월 10일자 매일신보 기사. 기사에 이원하가 사경을 헤매다가 마지막 힘을 다해 일장기가 내걸린 게양대 앞에서 일본 황궁을 향해 궁성요배를 하고 정좌한채 숨을 거뒀다는 내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충북인뉴스
<매일신보>는 이원하가 "1907년 청주 남면장이 되었으며 면장직을 사임한 후에는 은거했다"고 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이원하는 1933년에 농촌진흥운동이 일어나자 사창리(현 청주시 사창동)의 구장이 됐고, 농촌갱생에 최선을 다해 퇴폐한 사창리를 바로잡았다.
<매일신보>는 이원하에 대해 여러 차례 보도한다. 1927년 1월 8일 자 <매일신보>는 모충회 회장으로 있는 이원하가 일 천황 요시히토의 죽음을 기리며 청주시 사직동 모충사에서 1백여 명과 함께 궁성요배를 했다고 전했다.
모충사는 1894년 갑오동학농민 혁명당시 농민군과 전투과정에서 숨진 관군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조선왕조 지방에 세워진 최초의 현충시설다. 궁성요배는 천황이 사는 궁을 향해 절하는 것을 가리킨다.
평범한 촌민에 불과했던 이원하는 어떻게 '불명의 애국옹'이 되었을까?
<매일신보>는 1939년 2월 10일 '애국적 열정가의 귀감'이란 기사를 통해 이원하의 죽음을 알렸다.
신문은 "이원하는 72세의 고령으로 (사창리: 현 청주시 사창동) 구장의 직에 있어 부락민을 지도하며 그 부락을 갱생시키어 내려오던 중 노쇠병으로 지난 1월 초순부터 와병했다"고 전한다.
이어 "1월 23일경부터는 인사불성이 돼 중태에 빠졌었는데 1월 26일 오전 한 시경 그의 처 박연산이 간병에 피로하여 잠깐 잠든 사이에 인사불성의 중태에 있던 동 병인(이원하)이 약 1정(100여m)이나 떨어진 국기게양대 앞에 가서 동방(일본 천황이 사는 궁궐 방향)을 향하여 정좌하고 궁성을 요배(절)한 후 그대로 영면하였다"고 했다.
<매일신보>는 이씨의 죽음에 대해 "평소의 애국심이 무너져가는 육체를 무의식중에 국기게양대까지 운반하여 동쪽 하늘에 절을 하게 했다"며 "이와 같은 열정은 이원하씨 아니면 찾을 수 없다. (한)반도 인사 전반의 명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평가를 내렸다.
조각상 만들고, 교과서 등재 시도
<매일신보>는 계속해서 이원하에 대한 찬양 기사를 쏟아낸다. 이씨의 죽음을 보도한 지 하루 뒤인 1939년 2월 11일에는 '이원하 옹의 애국미담, 소(초등)교 교과서에 등재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작성했다.
이어 <매일신보>는 "이원하 옹(노인)의 애국열은 도저히 꿈도 꾸지 못할 바"라며 "한반도인 전반의 애국열을 고취함에 다시 없는 귀감이 되고도 남을 바이라 하여 이원하옹의 애국열을 금번에 편찬하는 소학교 교과서에 등재하기로 하였다"고 전했다.
같은 해 2월 16일에는 청주경찰서장과 청주모충회장, 충북도의회의원 등 청주의 유지들이 이원하의 추모기념비를 건립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또 그의 (친일) 사적을 조사해 팸플릿으로 만들어 전 조선에 배포할 계획이라고 알렸다.
이틀 뒤인 2월 18일 자 보도에서는 일본인 청년조각가 토바리 유키오(戶張幸男)가 이원하의 조각상을 만들기 위해 청주를 답방했다고 보도했다.
4월 12일에는 조선 조각계의 권위자 김복진(金復鎭)씨는 이원하의 흉상을 기부하기로 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