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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언행합일(知言行合一)의 실천적 삶의 궤적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 42] 그의 동포 사랑의 정신은 심도가 매우 높았다

등록 2022.01.30 09:51수정 2022.01.30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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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혁명 33인 기록화
3.1혁명 33인 기록화자료사진
 
그의 동포 사랑의 정신은 심도가 매우 높았다.

<내가 사랑하고 싶은 조선 것>이란 글에는 "특히 애정이 풍부"란 부제가 달려 있다. 

우리 조선사람처럼 진실한 사랑심이 많은 사람은 못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하자면 교회에서 무슨 구제사업을 하자고 발기하면 발기할 때는 조선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나 서양 사람이나 다 같이 찬동하고 발기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금전을 내는 것을 보면 외국 사람들은 대개가 자기의 이해타산을 먼저 하는데 조선 사람은 이해타산이 없이 그 적나라하게 한 푼이 있으면 한 푼을 내고 두 푼이 있으면 두 푼을 내며 자기의 힘이 있는 데까지 성력을 다하려 하며 또 서양 사람의 선교사나 기타 교회에 유공자가 오면 우리 조선 사람은 성심성의로 그들을 환영하고 또 기념품 같은 것도 잘하여 줍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이 중국이나 일본을 가거나 또 조선 사람이 교회유공자가 서양이나 기타 외국을 가면 그곳 교회에서도 물론 환영이야 하지만 우리 조선 사람들이 그들에게 대하듯이 그다지 따뜻하지도 못하고 또 기념품 같은 것은 문제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조선 사람들이 무슨 의뢰적 사상이 있어서 그러하거나 또는 배외적(拜外的) 사상이 있어서 그러냐 하면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 순연한 인류애라는 그것을 발휘하는 그 까닭입니다. 여러 가지의 예를 들지 않고도 조선 사람의 애심이 많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 사람인 나뿐이 아니라 조선을 다녀간 외국사람에게 그러한 말을 들었습니다. (주석 4)

그는 조국과 동포들을 사랑하였기에 한말의 유력인사, 황족과 대신들이 '독립청원'이면 몰라도 '독립선언'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던 살벌한 무단통치 시국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생과 사의 갈림길이 되는 재판과정에 검사에게 "금후에도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하였다. 
 
 민족대표 박동완
민족대표 박동완자료사진
 


그는 33인 민족대표로 참여한 이래 절대독립론에서 한발자국도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1919년 3월 18일 서대문감옥에서 일인 검사에 대한 답변을 그대로 실천하였다. 

문 : 피고는 조선독립이 꼭 될 줄로 생각하는가.
답 : 그렇다. 일본과 열국들이 허락할 줄로 생각하고 있다.


문 : 금후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 물론 그렇다.

다음은 <동아일보> 1920년 9월 24일자 기사인 <제3일 오후의 기록 독립선언사건의 공소공판>의 일부이다.

문 : 일한합병에 대한 감상과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은
답 : 그것은 합병에 반대라고 하기 전에 먼저 조선민족의 자존(自存) 자립(自立)의 정신으로써 그를 대하게 되었고 조선독립에는 언제든지 기회와 동기가 있으면 민족적 운동을 하고자 하였소.
  
민족대표 중에는 변절한 사람이 있었다. 일부에서는 이들의 훼절을 두고 민족대표 33인을 싸잡아 비난하기도 하지만, 박동완 지사를 포함하여 다수는 끝까지 민족적 양심과 지절을 지켜냈다. 변절자는 어느 시대, 어느 조직에서도 있었다. 예수의 12제자 중에서도, 안중근의사의 단지동맹에서도, 김원봉선생의 조선의열단에서도, 손문이 주도한 중국 신해혁명의 동지 중에서도 변절자가 있었다.

근곡 선생은 대단히 사려 깊고 항상 공적인 책임감을 갖고 살았다. 파란이 많았던 삶의 궤적을 살펴볼 때 한 번도 자신의 길에서 뒷걸음치거나 옆길로 새나가지 않았다. 야만의 시대에 여간해서 그리 살기란 쉽지 않았음은 동시대 한국의 지성사와 종교인인명록이 보여준다. 

(그는) 신앙ㆍ사상ㆍ언론과 실행이 일치되도록 항상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초지일관, 비타협 원칙의 삶을 살았다. 변함없이 일생을 치열하게 살았다. 열심히 신앙하고, 사유하고, 말하고, 행하는 삶을 살았다. 지언행합일(知言行合一)을 몸소 실천하였다. (주석 5)
 민족대표 공판 장면(동아일보, 1920.7.13)
민족대표 공판 장면(동아일보, 1920.7.13)자료사진
 

근곡(槿谷) 박동완(朴東完) 연보

1855. 12. 27 -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함양박씨 양반관료 가문)
1894년 이전 - 서울로 이주 
1903~1905 -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서 수학
1906 - 대한제국 농상공부 기수(6품)에 임용(최초의 직장)
1907 - 배재학당 고등부 입학
1907 - 1908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됨
1908 - 존스(조원시) 목사 집례로 정동제일교회에서 세례받음
1909. 10. 또는 1910. 10 - 배재학당 대학부 입학(1912년 대학부 폐쇄)
1913년경 -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 법률학과 입학(1~2년 수학)
1915 - 감리교 정동제일교회 본처전도사(Local Preacher)
1915 - 한글로 발행된 당시 유일의 민족언론『기독신보』편집인 및 주필
1919 - 기미 3ㆍ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 - 자발적으로 참여 (2년여 옥고를 치름, 이필주 담임목사와 함께)
1923 -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소년부위원장
1923 - 국내 최초로 여름성경학교 개최(정동제일교회 기록상 최초의 주일학교장)
1924 - 국내 유일의 민족자본 창문사의 잡지『신생명』주간
1924 - 조선민립대학 설립기성회 이사
1925년 3월 - 흥업구락부(비밀결사 조직) 창립 멤버
1025년 4월 3일 - <신생명> 폐간 이후 10년간 절필
1927 - 신간회 본부 발기인 및 상임 총무간사
         주요 지회(개성, 광주, 평양) 설립시 본부 대표
         경성지회 정기대회 임시집행부 부의장 및 전형위원
1928 - 재만동포옹호동맹 중앙상무집행위원(윤치호와 함께)
1928 - 동(同) 동맹 조사위원으로 만주 시찰
1928 - 미국 하와이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K.C.C.:한인감리교 독립교단) 초대 담임목사 부임 /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교회 부설 한글학교 운영
1929 - 오하우 섬에서 제일 큰 한글학교로 발전시킴
1930 - 하와이 한인협회 창립 발기인
1934 - <한인기독교보> 편집인 겸 발행인 / 장로목사 안수
1935 -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중앙이사국장
1938 -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선교부 제1부이사장(선교부장 이승만)
1938 - 제28주년 경술국치 국민회와 동지회 합동기념식 주(主) 연사
1939 - 동지회 대표회장
1940 - 카우아이 미 감리교회로 전출
1941년 2월 - 각 단체 연합 임시대표회 위원장으로 하와이 한인사회의 화합을 위해 활동
1941. 2. 23 - 미국 하와이에서 소천
1941. 4 -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
1962. -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음
1966 - 국립 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이장


주석
4> <별건곤>, 1928년 5월 1일.
5> 박재상ㆍ임미선, 앞의 책, 214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박동완 #민족대표_33인 #박동완평전 #근곡_박동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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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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