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시작(1908)평동 구세군 본영으로 추측되는 건물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념 촬영.
구세군역사박물관
이런 엄중한 규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복음 전파와 신앙 공동체 형성, 빈곤과 악을 타파하고 사회 개혁을 내세운다. 주로 사회적 약자를 섬기는 사회선교사업과 교육, 기초 의료사업 등을 실천한다. 전 세계 구세군을 총지휘하는 '만국 본영'과 각 지역(나라)에서 구세군 사업을 지원하는 '지역사령부'를 둔다. 우리나라엔 '구세군 한국 본영'이 있다.
식민지확장과 1차 세계대전 영향으로, 서구에선 독점자본에 착취당하고 인간으로서 권리를 누리지 못하던 노동자들이 구세군 운동에 큰 호응을 보인 적도 있었다. 이렇듯 구세군은 사회 개혁운동과 궤를 같이하면서 성장해 왔다.
군대로 오인
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한다. 뒤이어 정미7조약으로 나라는 껍데기만 남고, 군대 해산으로 전국에서 의병 활동이 들불처럼 일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창시자 명령으로 한국 선교가 시작된다. 호가드 등 4인이 '개척대'로 서울에 도착(1908.10)하여, 돈의문 인근 평동에 본영을 설치한다. 초창기엔 '길 전도'라 부르는 길거리 집회를 열어 무작위로 입교를 권유하는 방식으로 선교한다.
의병이라는 시대 상황이 군대식 위계를 가진 조직체계와 부합해 큰 호응을 얻는다. 이런 영향으로 타 교파가 10년 걸려 이룩한 선교를, 구세군은 1년 남짓에 달성하게 된다.
여기에 웃지 못할 현실이 숨어있다. 통역을 맡은 조선인은 영어 설교가 서툴다. 선교사가 '보혈 속죄'를 말하면 '국권 회복'으로, '회계 성결'은 '나라 독립'이라 통역되는 형편이다.
이렇듯 기울어가는 나라에 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상황에서, 가슴 뜨거운 젊은이들이 통역사 말을 듣고 입교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여기에 군복 입은 영국인들이 '입대'를 권유하니, 마치 의병에 지원하듯 지원자가 몰려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