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경성재판소일제 사법기구 중심을 이루던 옛 경성재판소. 현재는 얼굴만 남고, 내부는 신축하여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 중. 오후에도 햇볕이 들지 않는 정 북향 건물임.
이영천
북쪽을 향한 집 얼굴은 무척이나 차가운 인상이다. 하지만 그런 표정을 가진 집은 죄가 없다. 설령 뱀의 얼굴을 하였을지라도, 이용하고자 의도한 자들이 숨겨진 추레한 욕망을 집의 얼굴과 표정에 그렇게 투영했을 뿐이다.
일제는 저항하는 조선인들을 가두고 죽이는 도구로 이 집을 지었다. 수많은 독립투사와 애국지사가 이곳에서 억울한 판결을 받아 투옥되거나 불귀의 객이 되어야 했다. 분단된 남쪽의 나쁜 권력은 이 집을 정권 유지 보조 수단으로 써먹었다. 이 집에서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와 선량한 시민을 또 그렇게 만들었다. 진보당 사건이 그렇고 인혁당 사건이 그렇다. 70∼80년대 학생운동을 하던 많은 이들도 이 집에서 비슷한 판결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일제와 나쁜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집은 67년 만에 강 건너로 이사했지만, 이 집에서 거리낌 없이 나무망치를 두드렸던 자들에 대한 기억마저 지워진 건 아니다. 아름다운 그림을 상설 전시한다고, 집에 대한 부끄러운 역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핍박과 저항은 어떤 관계를 통해서도 변치 않는 '상수'라는 사실을 뱀의 얼굴을 한 이 집조차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독일 영사관
서울시청 서소문별관과 시립미술관 인근에 나라에서 세운 최초 근대식 학교 육영공원이 있었다. 갑신정변 후 세워진 육영공원(1886)은 지나친 영어 교육과 양반 자제만을 위한다는 비판과 재정난에 직면해 폐교(1894)되고 만다.
독일과 영국은 같은 날(1883.11.26) 조선과 수교한다. 타 제국과 달리 조선에 소극적이던 독일은 공사관 대신 영사관으로 만족한다. 독일영사관은 수교 후 여러 곳을 전전하다,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에 자리(1891.11.01로 추정) 잡는다.
아관파천 후 환궁한 고종은 경운궁을 정궁 삼아 제국을 선포한다. 아울러 황제국 위엄에 걸맞은 궐 확장을 꾀하면서 경운궁 주변에 강력한 토지규제 정책을 시행한다. 이 정책으로 많은 선교단체가 정동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
이때 독일영사관 터도 한국 정부 소유(1900.03)로 넘어온다. 정부는 회현동에 영사관 터를 마련해 주나, 독일은 1902년에서야 공관을 지어 이전한다.
한국 정부는 한 발 더 나아가 덕수궁 돌담길도 폐쇄해 경운궁에 포함하려 시도한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한양 외교가에 파문(1902.05)이 일어 반대 여론이 비등한다. 고종은 한 발 물러나 계획을 취소하는 대신, 경희궁을 잇던 무지개다리처럼 양쪽을 돌다리로 잇는 방안을 제시한다. 덕수궁 돌담길을 이 다리로 건넜으나, 언제 사라졌는지는 불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