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10일, 김용균재판 1심 선고가 내려진 후 입장발표 기자회견
김용균재단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라는 피켓을 든 사진을 찍고 불과 며칠 후에 사고를 당했던 고 김용균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고, 전례 없던 일들을 만들어가며 그동안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보다 효율과 이윤이 우선인 우리 사회에 조금씩 변화를 주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그동안 숱한 솜방망이 처벌을 겪어왔지만, 이번에는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가 모두에게 있었다. 그런 기대와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가 절실했기에 1년이 넘는 1심 재판기간 동안 피고인들과 그들이 고용한 대형 로펌의 변호사가 늘어놓는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들으며 분노를 삭일 수 있었다.
검사가 구형의 취지를 설명할 때도 구형 내용에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간의 투쟁과 유가족·동료들의 아픔이 조금이나마 보상을 받는 것 같았고 판사의 선고이유를 들을 때도 중간중간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했던가. 재판부의 전례없는 현장검증까지 이루어졌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피고인 중 단 한 명도 감옥에 가지 않았다.
재판부는 한국서부발전 김병숙 대표이사에겐 무죄를 선고했고, 다른 13명의 피고인들에게는 최고 징역 1년 6월(최저 금고 6월)에 2년의 집행유예 또는 벌금형을 선고했다. 법인에 내려진 선고도 마찬가지였다. 원청 한국서부발전은 1000만원, 하청 한국발전기술은 1500만 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사람이 죽었는데 단 한 명도 실질적인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피고인들이 잘못하여 고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맞지만 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면죄부를 준 것과 다름없다.
죄는 낱낱이 인정되었다
원청의 대표이사를 제외한 피고인들에게 내용상으로는 (구체적으로는 각자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과 업무상과실치사가 인정되었다. 특히 재판부는 원청의 피고인들에 대해, 핵심적으로는 아래와 같이 주의의무를 소홀히 하여 고인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인정했다.
태안발전본부 모든 설비의 소유자로서 설비에 대한 운전, 정비, 보수, 개선 권한 등의 권한을 바탕으로 설비에 대한 운영 전반을 실질적으로 관리·감독하고 있는 한국서부발전(이하 원청) 소속인 임직원들로서, 한국발전기술(이하 하청)에 9, 10호기의 상하탄설비 운전 등의 업무를 위임함에 있어 피해자 등 하청 소속 운전원들이 안전하게 업무에 종사할 수 있도록 설비에 대한 방호조치, 작업시 안전을 고려한 적절한 인원의 근로자 배치, 안전점검 등을 통해 상하탄설비 운전 등의 전반적인 업무와 관련하여 하청 소속 근로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확보하여야 할 업무상 주의의무가 있었다. 그럼에도,
① 협착사고의 위험이 있는 부위에 덮개·방호울 등 방호설비를 반드시 설치하여야 함에도 그대로 아무런 방호설비가 없는 상태에서 피해자를 비롯한 운전원들로 하여금 컨베이어벨트 및 아이들러에 대한 점검 작업을 하도록 하고,
② 위탁용역계약 체결 당시 명시된 근무 인원으로는 2인1조 근무가 어려우므로 그 인원 부족 여부를 검토하여 인원을 증원시켜주거나, 운전원들이 작업 지침에 따라 2인1조로 배치되어 작업을 하고 있는지 여부를 관리·감독하지 않아 피해자 등 운전원들이 단독으로 컨베이어벨트 및 아이들러에 대한 점검 작업을 하도록 방치하였으며,
③ 방호조치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피해자 등 운전원들로 하여금 컨베이어벨트가 가동중인 상태에서 그에 대한 점검 작업을 하도록 하였다.
더불어 2004년 9월에도 태안 4호기에서 단독작업 중이던 노동자의 협착사고가 있었고, 2017년 11월 협력업체 노동자가 회전체에 협착되어 사망하는 사고가, 한국발전기술 산하 영흥사업소에서도 협착 등의 사고가 수차례 있었던 것도 거론하여 원하청 피고인들이 사고의 발생 가능성과 위험성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던 점도 지적했다.
재판부는 "원청은 하청노동자들에게 상하탄량·혼탄계획이나 비율·사일로 레벨 등을 원청에서 요구하는 수준으로 맞출 것을 지시하였고,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낙탄처리를 지시하기도 하였고, 컨베이어 벨트 등의 설비는 원청 소유로서 하청노동자들이 임의적으로 개조·변형하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하였다"면서도 원청의 책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또 원청 대표이사인 김병숙이 취임 후 컨베이어벨트 관련한 위험성이나 발전기술과의 위탁용역계약상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인식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며 업무상과실치사죄 및 산업안전보건법위반죄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취임(2018년 3월 8일) 후 9개월이나 흐른 시점에 사고가 발생했음에도 몰랐다는 것이 '이해'되고, 시설과 설비도 원청의 소유이고, 2인1조 근무를 불가능하게 하는 용역계약 체결에서 '갑'의 위치에 있는 원청의 대표이사에게 아무 책임이 없다고 한다면, 처벌을 넘어 문제해결의 열쇠를 대체 누가 쥐고 있다는 말일까? 권한은 있는데 책임은 없다는 논리적 모순은 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하청업체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나 명백한 사건에서조차 원청의 대표이사에게 무죄판결이 내려진다면,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다고 한들 얼마나 의미있게 적용될 수 있을지 심히 우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