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정치는 어떤 회사도 자유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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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과 시즌이 되면 다들 몸을 사리고 상사의 눈치를 살핀다. 평가자의 눈치를 보는 것 자체가 평가의 주관성과 평가자의 재량권을 방증하는 것으로, 팀원들은 암묵적으로 성과가 평가의 전부가 아님을 받아들인다.
"정치도 실력이다"라는 자조 섞인 말을 뱉으며 씁쓸한 현실을 받아들이지만, 성실하고 성과도 좋은 선배조차 본인 어필에 능하지 못해 불이익을 받는다고 느낄 때면 정치에 거부감마저 든다. 학창 시절, 드라마 <미생>의 오상식 과장(이성민 배우)을 보며 느꼈던 울분과 안쓰러움이 멀리 있지 않았다.
사실 사내 정치는 어떤 회사도 자유롭지 않다. 사내 정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범주가 달라지지만, 자기 PR도 흔히 정치로 여겨진다. 글로벌 IT 기업에 다니는 친구는 자기 어필에 강한 외국인들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다고 호소했고, 공무원인 친구 역시 승진을 위해 상사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한다고 걱정했다. 100% 양적 평가가 아닌 이상 직장인은 사내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현대 분업 사회의 일반직에서 개인이 혼자 성과를 내는 일은 많지 않기 때문에 그 공(功)을 여럿이 나눠 가진다. 결과적으로 나의 성과로 돌아오는 부분은 작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티가 나지 않고 '가마니'가 되는 것이다. 평가자도 평가 대상자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각 개인도 본인 PR을 해야 하는 이유다.
유의할 점은 자기 PR도 실력으로 인정되는 조직(평가자의 주관 개입)에서 평가 자체가 일방적(피드백 없음)이고 기준이 모호하다면 평가는 오히려 근로 의욕을 감소시키고 비생산적인 감정노동을 유발한다는 점이다. 낮은 고과를 받으면 그 타당성에 의구심이 생겨 조직에 대한 신뢰가 낮아질 것이고, 좋은 고과를 받으면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상사가 고과를 잘 챙겨준 것으로, 강요된 고마움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평가의 목적이 노동자의 근로 의욕을 고취하고 인적 자본의 질을 높이기 위함이라면 지금의 제도가 과연 그 목적성에 부합하는지 의문이 든다.
어차피 모두가 만족하는 평가제도는 있을 수 없다. 고과를 잘 받은 사람은 현재 평가 시스템에 만족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불평을 하는 게 인간의 심리다. 업계, 직무, 시대에 따라 적합한 평가 방식이 다르니 효과성 측면에서도 완벽한 제도는 있기 어렵다. 마이크로소프트나 델 같은 글로벌 선두 기업들도 순위를 매기는 랭크(rank) 시스템을 폐지하고 360도 다면 평가를 시도하는 등 계속 더 나은 대안을 찾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조직문화가 중요하다. 평가가 완벽하지 않아도 신뢰와 투명성, 소통(피드백)이 자리 잡은 조직이라면 평가의 부작용을 상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를 포함해 많은 기업들이 평가제도가 놓치는 부분을 조직문화로 보완하려는 이유다.
세상이 그대를 작게 만들지라도
희소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대부분 경쟁을 해야 한다. 학생 때는 시험을 보고 점수에 따라 순위가 매겨졌다. 내 노력에 따라, 나의 실수 여부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기 때문에 그 결과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직장 생활을 하며, 노력한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음을 알아가고 있다. 시험처럼 맞고 틀리고를 분석해 내가 보완할 점을 쉽게 알면 좋을 텐데 명확하지 않은 기준으로 평가를 받다 보니 직장생활은 오답 노트를 작성 하기가 어렵다. 성실히 일하고 도움이 되는 팀원이 되고자 노력하고 자기 계발도 꾸준히 하지만 그만큼의 고과가 나오지 않는다.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나에게서 문제를 찾고 비슷한 직급의 경쟁자들과 나를 비교한다. 그리고 대개는 그 반복 과정에서 자존감이 낮아지고 자기 착취를 하게 된다. 각 팀과 각자의 상황은 고려되지 않고 결과 측면에서 견주게 되기 때문이다.
계속 C 고과만 받다가 진급을 앞두고 B를 받은 적이 있다. 직속 상사는 본인이 팀장님께 내 고과를 챙겨달라고 말했음을, 다섯 번 넘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얻은 B였다. 의무적 고마움과 함께 느낀 것은 내 실력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마침 팀장님과 대화할 기회가 있어 여쭤보았다.
"고과를 확인했습니다. 앞으로 제가 어떤 부분을 더 발전시켜야 할까요?"
"아니야, 지금도 잘하고 있어. 지금처럼 그냥 계속하면 돼."
그리고 팀장님과의 대화를 통해 A를 받지 못한 것이 구조적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만약 팀장님의 피드백이 없었다면 나는 고과가 보내는 시그널을 잘못 이해해 자신감을 잃고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내 실력 때문이 아님을 알았기에 털고 나아갈 수 있었고 누락 없이 진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