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어나더 라운드> 스틸 컷
(주)엣나인필름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마틴은 점점 수업에 활력과 자신감이 떨어진다. 급기야 입시를 앞두고 걱정된 학부모들이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역사 수업의 문제점을 토로한다. 좌절감에 빠진 마틴은 위로받고 싶지만, 가족 관계도 예전 같지 않다. 다 자란 아이들은 아빠를 본체만체하고, 부인과도 남처럼 정서적 거리가 멀어진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마틴은 나보다 상황이 더 심각했다. 권태가 이미 깊을 대로 깊어져 일상마저 위태로워 보였다. 이때 비슷한 고민을 하던 친구들이 혈중 알코올 농도 0.05% 유지 실험을 제안했고, 어느 정도 활력을 되찾는데 알코올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술이 과해지는 순간 곧 그 힘을 잃었고, 일과 가정이 깨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알코올 중독이 되어버린 한 친구는 목숨마저 잃었다.
빛바랜 중년을 벗어나기 위해 치기 어린, 하지만 절실했던 그들의 심정이 십분 공감되어 가슴이 쓰렸다. 하지만, 역시 술은 중독이라는 치명적 결함 때문에 중년의 권태를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에는 위험했다. 그렇다면 술 없이도 활력 있게 살아가는 현실의 주변 50대들은 도대체 어떤 낙으로 살고 있는 걸까?
50대 후반의 한 지인은 탁구와 기타와 사진 출사 등으로 일주일이 '순삭'이다. 오죽 바쁘면 끼니를 알약 두세 알로 때우는 시대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거냐고 한탄할 정도이다. 의욕도 왕성해서 글도 쓰고 싶은데 시간 내기가 영 쉽지 않다고 한다. '탁구와 기타와 사진이 그렇게 재미있는 활동이었나?' 호기심이 일 정도로 취미 활동에 푹 빠져 있는 지인이 좋아 보였다.
드라마에 빠진 분도 여럿이다. 하긴, 우리나라 드라마가 오죽 재미있나. 탄탄한 대본에 영상미까지 갖춘 잘 만든 드라마들이 넘치니 시청자는 즐기기만 하면 된다. 드라마를 보며 역사적, 과학적 지식을 넓히기도 하고, 다양한 인물탐구와 인생역정의 간접경험이 현실 이해에 도움이 되기도 된다. 때론 작가의 메시지가 뭉클하게 와닿기도 하고, 인생 로망의 대리 실현까지 가능하다. 이만한 즐거움을 다른 데서 찾기는 쉽지 않다.
비슷하게, BTS를 비롯해 손흥민, 요즘엔 차준환 선수까지 유명인의 매력에 푹 빠진 분들도 있다. 이분들은 평상시에는 심드렁하다가도 좋아하는 이의 이야기에는 눈빛을 반짝이며 급 생기가 넘친다. 누구는 콘서트 예매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고도 하고, 누구는 덕후 활동에 밤을 새운다고도 한다. 사실, 따분해지는 중년의 일상에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열정을 쏟는 일만큼 삶을 황홀하게 재점화할 수 있는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정신을 번뜩나게 한 책 속 구절
나도 이런저런 데에 기웃거리며 관심을 가져보지만, 뭐든 쉬이 질리는 성격이라 오래가지 않는 게 문제다. 게다가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우고 나니 자꾸 소임을 다한 은퇴자의 심정이 되어 버려 만사에 점점 심드렁해지는 것도 걸림돌이 되는 것 같다. 몸도 이런 풀어진 마음 상태를 알아차리는지 점점 더 신통치가 않다.
그렇잖아도 얼마 전, 욕실 청소를 하다 허리를 삐끗하는 바람에 일주일 간 고생을 한 적이 있었다. 회복 전 잠시 외출을 했는데, 걸을 때 아픈 허리가 자극되어 "아이고,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내가 낸 소리지만 듣고 있자니 50 나이에 내가 벌써 노인 행세를 하고 있나 싶어 얼마나 어처구니없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