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년에 곳간을 열어 이웃을 도운 일본인 다카기 쇼지를 기린 송덕비
장호철
일본인 송덕비는 '유지 고목창치 군 구황기념비(有志高木昌治君救荒紀念碑)'다. 다카기 쇼지(高木昌治)는 인동우체국 근처에 산 일본인으로 인동 지방에서 최초로 자전거를 탄 사람이다. 그는 곡물상이었는데, 함경도까지 왕래하며 조를 많이 취급하였다고 한다.
곡물상이어서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의 처지를 알아서였을까. 1926년부터 이어진 흉년으로 기근이 심했을 때 그는 곳간을 열고 곡식을 내어 주린 이웃들을 도왔다. 이에 인동 사람들은 그의 덕을 기려서 1930년 1월에 '구황 기념비'를 세웠다. 앞면에 비 이름과 글을, 왼쪽 옆면에 건립 시기를 새겼다.
곳간 열어 이웃 살린 일본인은 곡물상이었다
비 이름 양옆에 새긴 글은 가뭄으로 향민(鄕民)들이 힘들어할 때 다카기 쇼지가 곳간을 열어 이들을 구제하니 사람들이 그 은혜를 돌에 새겨 오래 간직하겠다는 내용이다.
한발이 재앙이 되어서 / 어진 마을을 가혹하게 하였는데 / 오직 그대 의로움을 내어서 / 곡식 창고 열어 황폐한 고을을 진휼했네 / 정이 9년 세월 깊어가서 / 송축(頌祝)이 한 지방에 전하니 / 한 조각의 돌에 은혜를 기록해 / 길이 잊기 어려움을 맹세하노라.
비는 사각형 시멘트 받침대 위에 회색 화강암 몸돌에 지붕형 덮개돌을 얹었는데, 전체 높이는 136.5cm이다. 이 빗돌은 원래 인동초등학교 뒤편 우시장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도시 계획에 따라 인동지역이 개발될 때, 비지정 문화재로 분류된 비석들과 함께 2001년 7월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식민지에 살던 일본인이 흉년으로 굶주리는 조선인들에게 곳간을 열어 이들을 구제했고, 도움을 받은 이들이 이를 잊지 않으려 기념비를 세웠다는 미담은 뜻밖이다. 저간의 사정이야 모르지만, 어쨌든 이 일본인은 이민족을 이웃으로 여기고 '환난상휼(患難相恤)'을 실천한 것이다.
인동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다카기 쇼지는 해방 후 고향 오사카로 돌아갔는데, 뒷날 그 자손들이 진평동을 방문하여 기념비를 돌아보고 주민들에게 큰 호의를 베풀고 돌아갔다고 한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수탈했지만, 식민지에 이주해 살던 일본인은 어려운 이웃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으니 그것은 '압제'와 '피압박'으로 갈리는 대립적 처지를 넘어선 선린 교류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