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국을 보도한 신문 호외1945년 11월 23일 철저히 '개인자격'으로 환국한 임시정부 요인 1진의 귀국 내용을 보도한 서울신문 호외.
이영천(경교장 전시물 촬영)
임시정부 요인 1진이 귀국(11.23)한다. 개인 자격이었으되 귀국 일성으로 김구는 "내가 귀국할 때 한국 정부도 같이 돌아온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 1진은 경교장에 입주한다.
이곳에서 한반도 전역을 아우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작업이 시작된다. 제(諸) 단체는 물론 심지어 친일 경찰까지 임시정부에 몸을 의탁하려 기회주의적 속성을 내비친다.
그해 말 모스크바에서 '3상 회의(12.16∼26)'가 열린다. 이 회의에서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미·소·중·영 4개국이 조선을 최대 5년 기한으로 신탁통치 한다'는 결정이 내려진다. 이때 동아일보 오보(12.27)가 터져 나온다. 소련이 신탁통치를 제안했으며, 미국은 반대했다는 명백한 오보였다. 이는 언론 오보 가운데 가장 부끄러운 사례로 남아있다.
반탁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난다.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가장 적극적이다. 임정 주도로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12.29)'가 결성된다. 신탁통치에 관점을 달리한 송진우가 암살(12.30)되기도 한다.
동아일보 오보로 소련을 적대시하는 반공 열기가 급속히 확산한다. 여기에 친일파가 올라탄다. 더러운 과거를 반공이란 탈로 화려하게 포장하며, 기사회생할 정치 공간을 확보한다. 친일파들이 투철한 반공투사로 변모하고, 반탁운동으로 임시정부 좌·우파가 분열한다.
임시정부는 미군정청 조선인 관료와 경찰 등에게 총파업을 지시한다. 미군정청 업무가 마비되고, 이를 쿠데타로 규정하기도 한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긴 시간(1946.03∼1947.10)의 협의에도 불구하고 결렬되고 만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정읍발언(1946.06)'으로 분단이 명백한 단정 수립을 시사한다. 중도파가 나서 '좌우 합작 운동'을 펼치나 여운형 암살(1947.07.19)로 힘을 잃고 만다.
미국은 '트루먼독트린(1947.03)'을 통해 '냉전 시대' 서막을 열어나간다. 미소공동위원회 결렬로 한반도 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가 남북한 총선거가 결의(1947.11)되나, 결국 각국 이해관계에 따라 남한 단독선거(1948.02)로 귀결되고, 민족은 분단의 길을 걷게 된다. 제주도에서는 단독선거에 항거한 '4.3항쟁'이 벌어져 피의 살육이 자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