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1월 6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주최로 열린 인권회복기도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정의구현사제단이 아무나 해내기 어려운 시기에 지적 정직성과 도덕적 순결성을 유지하면서 광기어린 권력집단에 비판의 치열함을 제시하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자기점검'이었다. 남을 비판하기 전에 스스로 성찰하고 토론하면서 그때마다 '시대의 징표'를 제기하였다.
시대의 징표를 깨닫는 것은 신앙인의 책무다.
시대와 무관한 삶이 불가능하듯 시대와 무관한 신앙인은 존재할 수 없다. 시대의 징표란 바로 세상 한 가운데서 하느님을 깨닫게 하는 하느님 대신의 표지이기도 하다. (함세웅, <정의구현운동의 시대적 배경>)
사제단이 가장 치열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활동했던 시기는 유신ㆍ5공의 부패한 독재권력과 그들이 생산한 물신주의(物神主義), 종교계의 세속화가 극한으로 치닫았을 때이다. 언론은 통치 언어의 전달자가 되고 종교인들은 황폐화된 세속에서 갈피를 잡기 어려워 하였을 시기였다. 지식인들은 소수를 빼고는 대부분 보신에 급급하였다.
노동자들은 '생명을 담보로 생존을 보장받는' 야만성이 산업화의 이름으로 강요되고, 천하지대본이라 일컫던 농민은 '천한지대본'으로 전락했다.
깨어 있는 국민이 진실에 허기지고 정의에 목말라 할 때에 정의구현사제단이 독재세력의 심장을 겨누는 죽비가 되고, 그 확장성에 쇄기를 박는 명징한 〈강론〉과 〈성명서〉등은 그야말로 '시대의 징표'였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곤 서로를 향한 온전한 믿음과 연대 그리고 순백의 말(글)과 기도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목청 높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은 '다원속의 통일된 조직'인 천주교의 울타리에서, 사제들이 하나같이 집합명사가 되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