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에 세워진 학생 박동보 구황비.
장호철
박동보는 아들인 박도환과 함께 곳간을 열어 굶주린 이웃을 구제해 주었는데 지역 주민들이 이를 기려 비석을 세웠다. 비의 앞면에는 '학생 박동보 구황비(學生朴東輔救荒碑)'라 새겨져 있고, 왼쪽 옆면에 '광서 삼년 정축 십이월 일(光緖三年丁丑十二月日)'이 새겨져 있는데 광서 3년이면 1877년이다.
비석은 높이 108㎝, 너비 44㎝, 두께 13㎝의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덮개돌을 얹은 형태다. 덮개돌과 받침돌의 높이가 각각 27㎝, 6㎝니 비석 전체 높이도 141cm에 그친다. 그래도 새로 세운 키 큰 오석의 빗돌보다 훨씬 정감이 있으니 그건 오롯이 빗돌을 세운 이웃의 마음일 터이다.
계선각 안 맨 왼쪽 빗돌은 박동보의 아들 박도환의 송덕비다. 박도환은 1902년(고종 39)에 중추원 의관에 임명된 인물로, 1876년(고종 13)에 이어 1883년(고종 20)에도 큰 흉년이 들자 부친의 뜻을 받들어 곳간을 열어 주린 이웃을 돌보았다.
<고종실록>에도 오른 박도환의 구휼
특히 그가 백성들을 구제한 사실은 <고종실록> 1884년의 기사에도 보인다. 구휼(救恤) 사업을 도와준 금산 군수 등을 표창해야 하고 사진(私賑 : 개인적으로 진휼함)한 사람으로 박도환을 들며 벼슬아치로 등용하는 것이 어떠냐는 이조(吏曹)의 보고에 대해서 임금이 윤허하였다는 내용이다.
"(……) 각읍(各邑)에서 사진(私賑)한 사람 가운데 선산의 전(前) 사용(司勇 : 정9품의 벼슬) 박도환은 상당직(相當職)에 조용(調用 : 벼슬아치로 등용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 8월 18일 기축 3번째 기사
비의 앞면에는 '행 용양위 부사과 박공 도환 송덕비(行龍驤衛副司果朴公道煥頌德碑)'가, 오른쪽 옆면에는 건립 시기인 듯 '임자 춘삼월 상한(壬子春三月上澣)'이 새겨졌다. 임자년은 1912년, 강제 병합된 지 2년째인데 이 시기 그의 관직은 중추원 찬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