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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에 걸친 '구황의 자선', 빗돌로 남았다

구미 ‘박동보 구황비’와 계선각(繼善閣)의 빗돌 이야기

등록 2022.04.05 09:58수정 2022.04.05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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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선각은 구미에서 흉년에 이웃을 구휼한 3대의 송덕비를 모아놓은 비각이다.
계선각은 구미에서 흉년에 이웃을 구휼한 3대의 송덕비를 모아놓은 비각이다. 장호철

구미시 야은로에서 지산동으로 빠지는 샛길, 기아오토큐 건너편 산어귀에는 기와를 얹은 흙 담장으로 둘러싸인 낡은 팔작지붕의 누각 한 채가 서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누각 정면 처마 아래엔 '繼善閣(계선각)'이란 현판이 걸렸다.

구미시 지산동의 '계선각'

몇 발자국 앞에 난 한길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나다니지만, 이 누각의 내력을 알거나 그걸 궁금해하는 이들도 없는 모양이다. 동네 토박이일 듯한 이들에게 물어봐도 머리를 갸웃하여서 나는 부득이 지산동 주민센터의 도움을 받아서 간신히 이 누각을 찾을 수 있었다.

누각은 단청한 기둥 사이에 벽 대신 청색의 나무 창살을 두었는데 누각 안에는 세 기의 빗돌이 서 있다. 그러니까, 이 누각은 비석을 보호하는 비각이다. 주인공이 다른 비각은 제각각 '頌德碑(송덕비)'거나 '不忘碑(불망비)'다. 빗돌의 주인이 '덕을 칭송[송덕]'하거나 '잊지 못할[불망]' 선행을 베풀었다는 얘기다.
 
 4대에 걸친 자선을 시작한 박동보의 구황비(오른쪽 빗돌)를 신평동에서 옮겨오면서 왼쪽의 새 오석 빗돌을 세웠다.
4대에 걸친 자선을 시작한 박동보의 구황비(오른쪽 빗돌)를 신평동에서 옮겨오면서 왼쪽의 새 오석 빗돌을 세웠다.장호철
 비각인 계선각은 박동보의 아들, 손자, 증손의 송덕비가 보호 중이다.
비각인 계선각은 박동보의 아들, 손자, 증손의 송덕비가 보호 중이다. 장호철
 
남동쪽으로 난 일각문 앞 돌기둥 울타리 안에 두 기의 비석이 더 서 있다. 왼쪽은 오석(烏石)의 새 빗돌이고 그 뒤 오른쪽은 자연석으로 된 오래된 빗돌이다. 일각문 앞 안내판에 이 비각의 내력이 적혔다. 빗돌은 4대에 걸쳐 자선을 베푼 밀양박씨 문중 인물들의 송덕비다. 비각의 이름을 '이을 계(繼)', '착할 선(善)' 자로 쓴 까닭이 거기 있다.

누각 바깥에 선 빗돌의 주인공 박동보가 맨 윗대의 인물이니, 누각 안의 빗돌은 그의 아들과 손자, 그리고 증손자의 것이다. 원래 지산동에 있던 이 빗돌은 1993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는데, 덮개돌 일부가 파손되어 오석의 새 비석을 함께 세웠다고 한다.
 
 계선각의 구황 송덕비
계선각의 구황 송덕비장호철
 
박동보로부터 시작된 4대의 자선

'학생(學生)'이라 칭한 것으로 보아 박동보는 벼슬길에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지방의 유복한 자산가였던 듯하다. 굴욕적인 불평등조약 '병자수호조규'가 강요된 1876년(고종 13)은 혹심한 가뭄으로 인해 큰 흉년이 들었다. 특히 곡창지대인 경기와 삼남 지방이 한재(旱災)가 극심해 임금은 내탕고(왕실의 재물을 넣어 두던 창고)의 돈을 경기와 남쪽 세 도에 구제금으로 보내도록 하였다.
 
 1877년에 세워진 학생 박동보 구황비.
1877년에 세워진 학생 박동보 구황비. 장호철
 
박동보는 아들인 박도환과 함께 곳간을 열어 굶주린 이웃을 구제해 주었는데 지역 주민들이 이를 기려 비석을 세웠다. 비의 앞면에는 '학생 박동보 구황비(學生朴東輔救荒碑)'라 새겨져 있고, 왼쪽 옆면에 '광서 삼년 정축 십이월 일(光緖三年丁丑十二月日)'이 새겨져 있는데 광서 3년이면 1877년이다.

비석은 높이 108㎝, 너비 44㎝, 두께 13㎝의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덮개돌을 얹은 형태다. 덮개돌과 받침돌의 높이가 각각 27㎝, 6㎝니 비석 전체 높이도 141cm에 그친다. 그래도 새로 세운 키 큰 오석의 빗돌보다 훨씬 정감이 있으니 그건 오롯이 빗돌을 세운 이웃의 마음일 터이다.

계선각 안 맨 왼쪽 빗돌은 박동보의 아들 박도환의 송덕비다. 박도환은 1902년(고종 39)에 중추원 의관에 임명된 인물로, 1876년(고종 13)에 이어 1883년(고종 20)에도 큰 흉년이 들자 부친의 뜻을 받들어 곳간을 열어 주린 이웃을 돌보았다.

<고종실록>에도 오른 박도환의 구휼

특히 그가 백성들을 구제한 사실은 <고종실록> 1884년의 기사에도 보인다. 구휼(救恤) 사업을 도와준 금산 군수 등을 표창해야 하고 사진(私賑 : 개인적으로 진휼함)한 사람으로 박도환을 들며 벼슬아치로 등용하는 것이 어떠냐는 이조(吏曹)의 보고에 대해서 임금이 윤허하였다는 내용이다.
 
"(……) 각읍(各邑)에서 사진(私賑)한 사람 가운데 선산의 전(前) 사용(司勇 : 정9품의 벼슬) 박도환은 상당직(相當職)에 조용(調用 : 벼슬아치로 등용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 8월 18일 기축 3번째 기사

비의 앞면에는 '행 용양위 부사과 박공 도환 송덕비(行龍驤衛副司果朴公道煥頌德碑)'가, 오른쪽 옆면에는 건립 시기인 듯 '임자 춘삼월 상한(壬子春三月上澣)'이 새겨졌다. 임자년은 1912년, 강제 병합된 지 2년째인데 이 시기 그의 관직은 중추원 찬의였다.
 
 박동보의 아들인 박도환의 송덕비.
박동보의 아들인 박도환의 송덕비. 장호철
 
<고종실록>에 나온 대로 박도환이 관직에 등용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비에 새겨진 관직 '용양위 부사과'는 종6품의 관직이다. 맨 앞에 '행(行)' 자가 쓰인 거로 보아 실제 품계보다는 낮은 관직이었던 듯하다.

비석은 높이 120㎝, 너비 45㎝, 두께 15㎝의 몸돌에 팔작지붕 모양의 덮개돌을 얹었다. 덮개돌 높이 33㎝, 받침돌(비좌)의 높이가 6cm 남짓이니 전체 높이도 160에 못 미친다. 옮겨 세우는 과정에서 몸돌 아랫부분이 훼손된 듯,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다음 빗돌, 그러니까 가운데 선 빗돌은 박동보의 손자인 박효달의 송덕비다. 비의 앞면에는 '승훈랑 혜민원 참서관 박공 효달 송덕불망비(承訓郞惠民院參書官朴公孝達頌德不忘碑)'라 새겨져 있다. '승훈랑'은 조선시대 정6품 하계(下階) 문신의 품계다. 비석의 건립 연도는 확인할 수 없다.
 
 박동보의 손자인 박효달의 송덕불망비. 카메라의 화각에 들어오지 않아서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박동보의 손자인 박효달의 송덕불망비. 카메라의 화각에 들어오지 않아서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장호철
 
비석은 높이 134㎝, 너비 41㎝, 두께 19.5㎝의 몸돌에 팔작지붕 모양의 덮개돌을 얹은 형태다. 덮개돌과 받침돌 높이가 각각 44㎝, 7㎝이니 빗돌의 키는 거의 185cm에 이른다. 비각 안 세 기의 빗돌 가운데 가장 커서 창살 사이로 렌즈를 넣어 촬영하는 데 덮개돌이 화각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박효달도 조부 박동보와 부친 박도환의 유지를 받들어 곳간을 열어 빈민을 구제하였다. 조부나 부친보다 뒷날 세운 송덕비인데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이 그가 베푼 은덕을 기려 비석을 세웠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마지막 빗돌은 4대째 박소용의 송덕비다. 증조부와 마찬가지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한 듯 비의 앞면에 '유학 박공 소용 송덕비(幼學朴公韶鏞頌德碑)'라 새겨져 있으며, 비를 세운 연도는 알 수 없다. 덮개돌 없는 비의 높이는 142㎝, 받침돌의 높이 8.5㎝를 더해도 150cm를 간신히 넘는데, 비각 안의 빗돌 가운데 가장 수더분한 모습인데도 가장 안정적이고 당당해 보인다.
 
 박동보의 증손자인 박소용의 송덕비. 이 일가의 자선은 4대에 걸쳐 이루어졌다.
박동보의 증손자인 박소용의 송덕비. 이 일가의 자선은 4대에 걸쳐 이루어졌다. 장호철
 
박동보의 구황비에 따르면 그는 아들 박도환에게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살라고 유언하였으며 박도환은 부친의 뜻을 좇아 흉년에 곳간을 열어 힘겨운 이웃들을 구제했다. 이 집안의 구황은 이후 손자 박효달, 증손자 박소용 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그리고 그 은공을 잊지 못한 지역 주민들은 빗돌을 세워 그 덕을 기린 것이다.

이들이 실천한 애린(愛隣)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선대인 박동보와 박도환의 빗돌은 그 건립 시기가 새겨져 전하지만, 후대인 박효달과 박소용의 빗돌은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다. 박도환의 빗돌이 건립된 1912년 이후의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뿐 그 시기를 특정할 수 없는 점은 아쉽다. 또 이들 일가가 행한 자선의 구체적 내용이 전해지지 않고 있는 점도 유감이다.

한 대에 한 사람의 자선도 쉬운 일이 아닌데 4대에 걸쳐 이루어진 밀양박씨 가문의 선행은 놀랍다. 한 가문의 선행으로는 약 300년간 부를 이어오면서 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말고,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실천한 경주 최부잣집이 있다.

거기 비길 만큼의 부는 아니었겠지만, 선산의 밀양박씨 가문이 실천한 애린(愛隣)의 자선도 아름답다.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 이 일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가문의 영예이면서 이 고을의 자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나면서 이 4대에 걸친 선행은 시나브로 잊히었고 사람들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느라 고단한 삶을 꾸려간다. 이들의 선행은 잊혀 버렸지만, 우리는 안다. 선산고을 밀양박씨 일가가 몸소 실천해 준 애린의 정서는 시방도 도움이 필요한 그늘 진 곳에 미치는 이름 없는 이들의 따뜻한 손길로 연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싣습니다.
#박동보 구황비 #구미 계선각의 빗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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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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