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시구개수 노선도(1910년대)기존 도심과 용산 중심의, 식민통치공간 조성을 주 목적으로 한 식민도시 경성의 제1기 건설사업이었다.
국토지리정보원
도시화 측면에서 19세기 후반 서울은 분명 봉건 도시다. 근대 도시로 나아가려는 그나마의 노력마저 좌절되고, 가장 먼저 철도가 장악당한다. 1905년 전후, 용산 일대가 철도 조차장과 군사기지로 탈바꿈하면서 식민화 무력 기반이 완성된다.
남산이 일제의 정치와 행정, 문화 및 종교 중심지로 변모하고 명동 일대가 일본인을 위한 근대 도시공간으로 탈바꿈한다. 피식민지 초 기획된 '경성시구개수(1912, 1919)'는 식민도시 건설 착수단계였다.
이로써 도시공간구조가 재편되고 총독부·경성부청사 건립으로 식민통치공간이 창출되었으며, 태평로와 을지로 등 신작로가 개설되는 1920년대 중반에 식민도시 1차 건설이 완료된다. 이때의 도시 개조는 통치기반 구축이 주목적이었다.
일제의 도시계획 인식
제1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고도화로 서구 유럽은 폭발적 도시화에 직면한다. 인구증가로 전염병과 교통난, 슬럼화한 주택지 등 도시문제가 극심해지자 이의 해결 대안으로 도시계획이 유행처럼 번져간다. 1898년 영국에서 탄생한 '전원도시론'이 전 세계를 풍미한다. 일본도 도시계획법(1919)을 제정하나, 실효는 없었다.
일본인 건설 및 부동산업자와 관료, 친일파들이 이익단체 격의 경성도시계획연구회(1921)를 결성한다. 이들이 도시발달 견인 명분으로 도시조사를 시행하는 등 '법' 제정을 청원하지만, 실체는 땅 투기 다름 아니다. 이 시기 일제는 도시계획을 '국익에 반하는 수단'으로 여겼고 자연스레 총독부도 이런 기조였다.
1929년 세계 대공황엔 누구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일제는 돌파구를 만주사변(1931)이란 식민지 개척에서 찾는다. 만주국이 세워지고 군국주의로 전환한 일제는 중국 침략을 준비한다. 이에 만-선 공업화 필요성이 대두하고 '일-선-만 공업화 블록'이 실행에 옮겨진다.
하지만 만-선 공업화는 섬나라 그것에 철저히 보완·종속적 기능이어야 했다. 또한 일본 전범 기업의 진출 방편으로 기존 도시의 확장 필요성도 같이 제기된다. 이 계획을 완성하려는 수단으로 '북선(北鮮) 루트' 개발이 이뤄져, 함경도의 한적하던 어항 나진이 공업 및 군사도시로 순식간에 변모(1932)하는 천지개벽이 벌어지기도 한다. 도시를 넘어 지역계획이자 나아가 전쟁을 위한 국토계획 시작이었다.
일제는 국가가 통제하는 도시개발로 토지자원 수탈과 침략거점 확보 수단으로써 도시계획이 얼마나 유용한지를 마침내 인식하게 된다. 일본 도시계획법을 개정(1931, 1933)하여 국가주의 틀을 완성해 나간다. 이는 도시확장과 확장된 공간에 국가통제라는 개념이 교묘히 결합한 형태로 구현된다. 나라 전체를 파시즘 체제로 전환하여 군국주의와 천황제 이데올로기 구현의 첨병으로 도시계획을 활용하기 시작한다.
조선시가지계획령
일제는 조선을 미개한 나라로, 조선인을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야만인으로 보았다. 이런 인식과 배경에서 '조선시가지계획령(1934.06)'이 제정된다. 도시계획도 아닌 법도 아닌 모호한 명칭이 우선 눈에 보인다. 내용은 국가가 주도하는 '토지구획정리사업'에 다름 아니다.
이는 사업에서 지주 조합을 배제하고 총독부가 주도함으로써, 가장 효율적인 토지 수탈 제도 장치를 마련한 셈이다. 시가지계획령은 일본 도시계획법보다 더 과감했다. 기존 주거지의 슬럼화와 교통 등 기성 도심의 문제 해결보다는, 구획정리사업을 통한 신시가지 확장에 더 주안점을 두었다. 이는 일본 도시계획법이 내재한 허점을, 식민지 조선에서 실험적으로 적용해 봄으로써 그 개선방안을 찾아내겠다는 계산이었다.
일본 도시계획법에 설치된 각종 심의기구 또한 없었다. 조선 총독 혼자 결정하면 그게 바로 계획이요 정책이었다. 주거, 상업, 공업지역으로 나뉜 용도지역제에서 미지정지역을 별도 분리하여, 일본 독점기업의 공장부지 확보가 수월하도록 고려한 점도 눈에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