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를 끈 말을 만난 제주 함덕 해변가제주국제 즉흥춤축제 참여를 위해 머문 함덕에서 인간을 싣고 달리는 말을 만났다
곽승희
그날 저녁 숙소 근처 해변가를 산책하던 중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말 한 마리가 네다섯 명이 탄 수레를 끈 채 걷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를 동반한 관광객들이 그 위에 앉아 있거나 관심을 보였다. 수레가 잠시 멈춘 사이 길가에서 구경 중이던 아이가 옆 사람에게 말했다. 저기에 똥을 싸는 거라고.
아이는 말의 엉덩이 근처를 가리켰다. 나선형 판자가 말의 엉덩이 아래 부분을 받치고 있었다. 판자와 다른 색의 무언가가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말의 고삐를 잡고 있는 이가 아이의 말이 맞다고 대답해주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상황을 평가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말을 부리는 사람은 왜 저렇게 했을까. 말의 생물적 특성 때문이었을까. 말은 언제 똥을 누는지 알기가 어려운 동물이라서? 말은 아무 데서나 똥을 누는 동물이라서? 그 똥을 아무 곳에나 두면 안 되기 때문에?
아니면 말을 부리기 위한 효율성 때문이었을까. 말에게 편한 공간에서 똥을 뉘게 하고, 뒤처리를 도와주기란 이익에 도움 되지 않으니?
일을 하면서 똥을 싸는, 그 모습을 남이 볼 수 있는 상황이 말이 처한 현실이었다. 물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상황을 평가하고 싶진 않았다. 그럼에도 생명 활동의 끝이자 재시작인 '배출'의 현장을 이렇게 접하다 보니 다른 부분들이 연이어 걱정됐다. 먹이는 제때 공급받는지, 휴식 시간은 주어지는지, 원한다면 동족과 소통하며 살고 있는지.
생각의 끝엔 내가 있었다. 그렇게 삶이 좋다, 살아 있음에 행복하다 외치는 나지만 만약 저런 비슷한 상황을 만들게 된다면, 그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지.
'살아가는 것'이라는 목표
갑작스럽게 암 진단을 받고 수술과 치료를 받고 2~3년 내 재발률 높은 암씨앗 세포가 몸 안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후, 삶은 단순해졌다. 면역력을 높이고 몸의 생리적 균형을 바로잡는 일이 나의 지상 최대 과제다. 일을 통해 인정 욕망을 채우는 과거의 습관을 멀리하고, 소비를 최소화하고, 아주 미약한 노동이라도 수행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 공부를 한다.
과거에 비하면, 대부분의 현대인에 비하면 너무나 단순하고 간결한 일상. 그런 요즘이기에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면면히 관찰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 일상을 벗어난 후에도 나는 절실히 살고 싶어 할까.
순간적으로 오지랖 넓게, 오만하게 내가 말이라면 어떨까 싶었다. 물론 말에게 인간과 같은 자의식에 얽매이는 망상 같은 정신 활동이 있을진 모른다. 그냥 그 순간에는 말과 나의 위치를 동일하게 두고 싶었다.
저렇게라도 살고 싶을까? 그렇게 묻자, 이상하게도 마음의 복잡한 파도가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생명이라면 살고 싶어 할 것이다. 말은 계속 살고 싶어 할 것이다. 어떤 상황에 처하건 자신의 고삐를 잡은 이가 주는 식량이 소중할 테고, 그 먹이 활동의 결과물을 배출하는 일에 기쁠 것이다. 언제 죽음이 올진 몰라도, 그전까지는 잘 먹고, 잘 싸며 살아가는 것이 그의 목표일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몸의 자연스러운 회복 능력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살아있음의 즐거움을 느껴봤기 때문에, 더더욱 잘 사는 것이 나의 목표다. 어떤 상황에서도 잘 살기 위해서 나를 살리는 삶의 기술을 매 순간마다 적용하려 마음 쓸 것이다. 지금과 같은 단순한 일상에서 벗어나야 하는 때가 온다고 해도, 예전과는 다른 렌즈로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