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시계가 급박하게 돌아가던 지난 지방 선거, 부여의 유세 현장
오창경
4년 전, 그는 상대 후보에 비해 전력도 전술도, 수장으로서의 매력도 뒤떨어졌었다. 유세장 한구석에서 시민기자로서 그를 지켜보면서 과연 그가 당선을 거머쥘 수 있을지 내내 확신이 서질 않았다. 선거는 외모도 어느 정도 작용한다는 연구 논문도 있다고 했다. 상대 후보는 가는 곳마다 아줌마 부대들이 따라다녔지만, 그의 주변에는 시커먼 남자들 몇 명만 보일 뿐이었다.
키는 작고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리고 피부는 시꺼멓고, 눈빛만 살아있는 '한 사내'에 불과한 그에게 한 표 던져줄 표심이 어디에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여기는 '보수의 성지'인 충남 부여였다. JP(김종필 전 총리)의 그림자가 출마를 해도 당선된다는 보수의 땅에, 대학시절 운동권의 결기만 살아있는 그가 진보의 깃발을 꽂을 땅이 과연 몇 평이나 될지 미지수였다. 처음부터 게임이 되지 않는 승부에 과감하게 뛰어든 그를, 가상하게 여기는 민심은 많아도 표심으로 연결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박정현, 그에게 표를 줄 사람이 있을까
선거판에는 '끝까지 까봐야 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눈에 보이는 민심과는 다른 반전의 묘미가 있다는 뜻이다. 4년 전 부여군 지방 선거 결과가 그랬다. 눈빛만 살아서 번뜩이던 사내는 보수의 텃밭이라는 부여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으며 '최초 진보 군수'로 당선됐다. 그가 바로 박정현 군수다.
"맞습니다. 저 4년 전에는 바람으로 당선됐어요. 하지만 저는 4년 동안 부여 군민을 위해 부여를 위해 죽어라 일만 하지 않았습니까? 굿뜨래 페이를 만들어서 지역 경제 활성화시키고 부여군 부채도 다 갚지 않았습니까?"
4년 후, 6.1지방선거를 앞두고 그는 다시 부여 장날 유세 현장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그는 부여군수 후보로 재선에 도전에 나섰다. 여당 후보였고,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무장한 브레인들이 그의 곁에서 선거를 도와주고 있었다. 4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역동적인 선거전이었지만, 부여군엔 붉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부여는 다시 보수의 성지가 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게 되었고 그 격랑 속에 선거를 치러야 했다.
이른바 86세대였던 나는 4년 전 그의 유세현장을 관찰하며 나의 참여 의식이 발동하기 시작함을 느꼈다. 그렇게 4년이 흘렀고, 나는 이번 지방 선거에서 부여군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후보에 도전했다.
부여가 고향도 아니고 단체장 경력은커녕 변변한 인맥도 없었지만, 용감하게 도전해서 1, 2위 순위 경선까지 갔다(당선되지는 못했다). 지방선거에서 비례 대표는 당의 확장성에 우선한다고들 했다. 지난 지방 선거 때는 시민기자로서 선거를 지켜봤지만, 이번에는 기자이며 동시에 비례대표 2번 후보로서 박정현 군수 후보와 지방 선거에서 함께 뛴 기록을 쓰게 되었다.
그렇게 14일이란 선거운동이 마무리되고, 선거 당일이 밝아왔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한 대로 박정현 군수는 재선에 성공했다. 4년 전이 '바람의 선거'였다면, 이번엔 '역시 박정현 밖에 답이 없다'라는 군민의 한 목소리를 이끌어냈다.
박 군수가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지난 4년 간 그가 보여온 모습 덕분일 것이다. 그는 군수에 당선되자마자 부여 발전을 위한 프로젝트를 세우고 차근차근 실행해 나갔다. '지방 인구 소멸 방지' 대책으로 홍산면에 바이오 산업단지 유치를 추진했고 백마강변에 국가 정원 조성 계획을 세우고 예산을 확보했다. 부여 군민의 50년 숙원 사업인 세도면과 석성면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금강에 가칭 금강 대교라는 다리를 놓는 예산까지 따냈다. 박 군수가 성실하게 성과를 내자, 보수적인 부여 군민들도 그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지난 4년 동안 그는 지방 군 단위에서 최초로 1조 4천억여 원의 예산을 확보했고 중앙부처의 공모 사업에 도전해 따낸 사업들로 부여군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청렴한 행정으로 공무원들이 활발하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고, 군민들은 정체돼 있던 부여에 활력과 생기가 도는 것을 체감했다.
부여의 어떤 원로는 그의 행보에 '단군 이래 부여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한 군수'라고 칭송했고 수구 보수 세력의 수장들도 '군수는 색깔로 뽑는 것이 아니라 일을 잘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겨'라며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했다.
'살림 잘한 군수'는 주효했다... '역풍'에도 고수한 군수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