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호프부르크 왕궁 발코니는 히틀러가 빈 입성을 한 직후 군중 앞에서 연설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양문규
히틀러는 예술학교를 수차례 떨어지고 한때 '루저'의 삶을 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0여년 후 비엔나로 개선(?)하여 돌아온다. 1938년 3월13일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히틀러는 군중들의 환호 속에 빈에 입성했다.
비엔나의 호프부르크 왕궁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대 황제들이 살아왔던 곳으로 마리 앙투아네트 공주 역시 이곳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오스트리아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다. 왕궁 앞 너른 광장에는 16세기 초반 오스만튀르크의 침략을 물리친 오이겐 왕자의 기마상이 있다.
광장에서 올려다 보이는 왕궁의 발코니는 히틀러가 빈 입성을 한 직후 군중 앞에서 연설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는 그곳서 오스트리아 병합을 선언하고 선동적인 연설을 이어간다. 군중들은 광장서 박수를 치고 환호하며 열광한다. 환호하는 군중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프랑스 작가 에리크 뷔야르는 이 장면을 담은 필름 속 군중의 박수 소리가 너무 획일적이고, 힘차고, 용솟음치는 듯하여 과연 그것이 당시 똑같은 군중의 것인지 의심을 품는다. 나치는 많은 영화감독, 편집인, 촬영기사, 음향기사, 기술자를 고용해 기록영화 등을 제작한다.
뷔야르에 의하면 박수 소리는 나중에 영상에 첨가된 것이고 소위 후시 녹음의 결과다. 히틀러의 등장에 맞춰 미친 듯 울려 퍼진 박수 소리 중 어느 하나도 우리가 실제로 들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상들은 나치 선전상인 요제프 괴벨스가 기획한다. 괴벨스는 히틀러의 정치가 옳은 것인지 선한 것인지는 중요하지가 않았다. 심지어 그게 거짓말일지라도 이를 독일 국민과 전 세계를 향해 어떻게 감동적으로 아름답게 꾸며낼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이를 '정치의 미학화'라고 한다. 윤리를 미학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히틀러는 자기가 애호한 예술, 대표적으로 바그너 오페라의 비장하고 웅혼한 멜로디들을 자신의 정치에 자주 이용했다. 바그너뿐만 아니다. 베토벤의 9번 합창 교향곡조차 전쟁의 공격성을 찬양하는데 활용한다.
일본 군국주의 역시 "짧은 인생 다음, 사쿠라 꽃잎처럼 아름답게 저라"면서, 전쟁이나 살육을 아름답고 숭고한 것으로 꾸미고자 벚꽃의 미적 가치를 활용한다. 일제 때 시인 서정주는 필리핀 레이테 만에서 '옥쇄'한 조선인 가미가제 특공대를 이런 식으로 아름답게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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