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용 의병장 격문
인천대
'숭정'은 명나라, '광서'는 청나라 연호이고, '숭정 기원후 5회 병신'과 '광서 22년'은 모두 서기 1896년을 말한다.
"문화재 보물 지정할 만큼 귀중... 독립기념관에 보전되도록 해야"
이태룡 박사는 "1896년 2월 19일(음력 1월 7일), 당시 진주는 한성‧평양‧대구와 더불어 4대 도시 중의 하나였고, 21군을 관할하던 진주 관찰부가 의병 수중에 들어갔다"며 "이 소식은 조선은 물론이고 일본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에도 날 정도로 깜짝 놀랄 일이었다"고 했다.
이 박사는 "1896년 경남 안의(함양)에서 거의한 노응규가 촉석성 안에 본부의소(本府義所)를 설치하고 나흘째 되던 2월 23일(음력 1월 11일), 진주에서 거의한 정한용이 촉석성 밖에 본주의소(本州義所)를 설치하고 상소를 올렸고, 이어 진주관찰부 관할 각군과 동래부에도 '진주창의장 수루전격사'라는 이름의 격문을 보내 의병 참여를 독려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노응규가 창의한 지 1주일이 지난 2월 26일(음력 1월 14일), 두 의진에서는 함께 창의한 뜻을 하늘에 고하고 임진왜란 충신들을 모신 창렬사(彰烈祠)와 논개 사당인 의기사(義妓祠)에도 제사를 올려 지방 인심을 안정시켰는데, 이날 행사에 참석한 인원은 1천여 명이라고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나타나 있다"며 "이튿날 노응규는 비로소 국왕께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다"고 했다.
노응규 의병장의 친필 상소문과 정한용 의병장의 격문‧전령은 <고종실록>이나 <승정원일기>(당시 비서원일기)에 실려 있지 않았다.
이태룡 박사는 그 이유에 대해 "고 려증동 교수(국문학 박사, 경상국립대)께서 <신암유고>를 엮을 때 했던 말이 생각 난다. 상소문에서 '전하는 사직을 위해 몸을 바치고, 신하는 임금을 위해 죽고'라고 한 것처럼, 지나치게 과격해서 아마도 작성만 하고 보내지 않았거나 국왕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일제 관헌에 의해 빼앗겼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번에 확인된 노응규‧정한용 의병장의 친필 상소문과 격문‧전령의 원본은 모두 19매다. 원본은 현재 일본에 있다.
이태룡 박사는 "일제침략기 전기의병사에서 유일한 것으로 원본의 가치는 문화재 보물로 지정해야 할 만큼 귀중한 것이기에 장차 일본으로부터 반환을 받아 독립기념관에 보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