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픽사베이
"어머님은 아이 사교육으로 뭘 시키고 있나요?"
"본인이 하고 싶어 해서, 유도를 배우고 있어요."
"그리고 또요?"
"다른 건 없는데요..."
"아, 사교육 안 하는 것 치고는 아이가 공부를 잘 하네요. 그래도 어머님, 아이가 나중에 공부로 하는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러려면 늦어도 여름방학부터는 공부를 시작해야 해요. 영어나 수학 같은 공부 있잖아요. 안 그러면 혹시 나중에, 어머님께서 '그때 시켰어야 하는데'하고 후회를 하게 되실 수 있거든요."
나는 아이가 집에서 책도 읽고 문제집도 풀면서 나름 공부를 하고 있다고, 이런저런 옹색한 변명을 주절이다가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아이 교육에 무관심한 엄마가 된 것 같아 부끄러웠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많이 뛰어놀면 스스로 재미있는 것들을 찾아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저학년일 때는 그런 모습을 보면 기뻤다. 초등학교 6학년인 지금도 아이는 스스로 재미있는 것들을 잘 찾지만, 나는 전처럼 마냥 기쁘지는 않다.
겉으론 괜찮은 척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게 가장 좋은 거'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싶고, 실은 학교에서 성적도 잘 받아왔으면 좋겠다. 같이 놀던 다른 아이들이 공인 영어시험을 준비 중이라 하고, (초6인데도) 벌써 중1 수학 과정을 마쳤다는 말이라도 들은 날엔, 유튜브 영상을 보며 낄낄거리는 아이에게 '잔소리 폭탄'을 날리게 되고 만다.
지난해, 5학년이던 아이는 일주일에 이틀만 학교에 갔다. 학교에 다녀온 어느 날, 온라인 수업만 해도 되는 걸 왜 학교에 이틀씩이나 나가야 하느냐면서 아예 '학교를 그만 다니겠다'고까지 선언했다. 이성적으로야 '그래, 삶에는 다양한 길이 있단다. 엄마는 언제나 너를 응원해'라고 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내 입에서는 이미 "넌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래!"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가고 있었다. 앞으로는 다른 아이들처럼 매일 학원에 다니라며 아이를 윽박질렀다.
그날, 운동을 간다며 오후 4시쯤 집을 나선 아이는 밤 9시가 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깜깜한 밤 아이를 찾아 동네 골목골목 헤매면서, 엄마가 잘못했으니 제발 돌아오라는 마음만 간절해졌다.
밤 10시가 넘어 돌아온 아이는, 뭔가를 오래 생각한 듯 결심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엄마, 내가 집에 늦도록 안 들어온 건 내가 잘못 했어. 그런데 엄마가 날 좀 믿어주면 좋겠어. 나도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까."
나는 아이에게 사과하면서,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뒤처지면 어쩌나 걱정하는 마음... 그럼에도 매일 마주하는 현실
아이와 관계를 해칠까 두려워 아이가 싫다는 걸 억지로 시키지 않겠다고는 했지만, 이게 맞는지 확신이 없다. 머릿속에서는 공부는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만, '내 아이가 정말 공부를 안 해도 미래에 밥벌이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그건 또 잘 모르겠다. 남들은 벌써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데, 우리 아이만 뒤처진 건 아닐까? 이러다 돌이킬 수 없으면 어쩌나, 억지로라도 시키는 게 옳을까? 그렇게 수시로 걱정한다.
가끔 내 상상속 아이 미래는 너무나 어두워 보여서, 한 번씩 그 암흑에 압도당하고 마는 때가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이와의 관계가 나빠질 뿐이라는 걸, 매번 또 한바탕 홍역을 치른 후에야 깨닫는다.
깨달음은 깨달음일 뿐, 매일 마주하는 현실은 바뀐 것이 없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나도 모르게 잔소리가 튀어나올 때, 의식적으로 멈추려고 애쓴다는 것 정도. 선생님과 상담 이후에도 잔소리가 자꾸 나오려 근질거리는 입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아이를 붙잡고 물었다.
"엄마가 선생님하고 상담했는데, 여름방학에는 너 공부시키라고 하시던데, 어떻게 해야 할까?"
"난 싫은데!"
"다른 아이들은 다 공부하고 있대. 너만 안 하고 있다고, 나중에 중학교 가서 하면 늦을 거라고 하시던데?"
"다른 애들이 불쌍한 거야. 학교에서 가만히 앉아서 공부만 하는 것도 충분히 힘들다고. 근데 학원까지 어떻게 가. 나는 안 가!"
단호한 아이의 말에 갑자기 속이 답답해진다. 잠깐 창가로 가서 바깥 공기를 쐬려는데, 아이가 종이접기로 만들어 책장에 전시해 놓은 작품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가 수백 개의 종이 블록을 접고 이어 붙이고, 로봇 다리의 비율을 맞추려다 잘 안 되어서 짜증을 내고, 다시 시도하고, 밤이 늦어도 잠을 못 자며 종이를 바꿔보고, 그런 과정을 거치던 모습이 가만히 떠오른다. 그제야 아이의 삶에 국영수 공부 말고도 다양한 경험이 가득하고,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넘치고 있다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