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클럽 친구들과 함께 찍은 단체 발 사진. 풋살화는 화려할수록 좋다.
이지은
시작은 늦었어도 성장만큼은 빨랐으면 싶은 마음에 자꾸만 조급해졌다. 언젠가 팟캐스트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에서 농구선수 현주엽이 농구에 노련해지고 싶다는 송은이에게 "농구 잘하고 싶으면 방송 녹음하는 지금도 한 손으로는 공을 튀기고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 적이 있다.
그 말을 귀에 담으며 '회사 책상 밑에서 굴릴 풋살공 하나 살까? 책상에 가려지니까 내 발놀림 아무도 모르겠지?' 생각했는데, 내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생각해서 참았다. 대신에 점심시간마다 회사 근처 공터에 몰래 숨어들어 리프팅(발, 이마 어깨 등을 활용해 공을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고 튀기는 훈련) 연습을 했다.
그마저도 연습 첫날부터 한 동료에게 발각당했고, 그가 다른 동료들을 불러 모아 구경시키는 바람에 수치심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하루 해프닝으로 끝나버렸지만.
같이 축구하는 친구들은 나보다 이미 몇 단계 레벨업한 상태라 마음이 급했다. 비슷하게 시작했어도 지척에 함께 공을 차주는 애인 덕에 훨씬 성장 속도가 빠른 이들도 몇 있었다.
반면에 나는 축구와 풋살의 차이도 잘 몰랐고(내가 축구하는 줄 알았는데 풋살이더라!), 구기종목도 거의 처음 접해보는 데다가 내 미숙함을 기꺼이 인내해줄 만한 애인도 없으니까. 열심히 하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답답했다. 그때 축구 친구 황소가 조언을 주었다.
"언니, 20대가 체력으로 운동한다면 30대는 재력으로 운동하는 거야. 20대는 체력, 30대는 재력. 돈을 써."
30대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축구교실을 수소문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축구교실은 초등부 어린이가 중심이고, 그나마 여성 초보 수업은 평일 오전 10시에 개설된다는 점이었다. 팀 설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초보 여성/주부반."
여성은 성별이고 주부는 직업인데 어떻게 한데 묶이는지 의아했는데, 이는 합집합이 아니라 교집합이어야 수강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이 시간대는 가족을 회사/학원/학교에 보내고 잠깐 숨 돌릴 틈에 운동하려는 여성들이 참여 가능한 시간이고, 여성이지만 직장인인 나는 해당 사항에 들지 못했다.
저녁 시간대에는 보통 직장인반/선수반으로 구성되는데, 이 역시 기본값은 '남성'이었다. 나는 마치 좋아하는 이에게 고백했다가 가차 없이 거절당한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남자들만 축구 가르쳐주고… 나는 안 가르쳐주고…."
왠지 모를 서운함에 실망하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집에서 한 시간 떨어진 축구교실 여성반을 찾아냈다. 수업은 저녁 8시 30분부터 10시까지. 왜 이렇게 늦게 시작하는지 물었더니, 주부들이 아이들과 남편 밥 차려준 다음에 나오는 시간대라고 한다.
평일 여덟 시간 근무하고 격렬한 운동까지 마친 후 집에 돌아오면 밤 11시. 기진맥진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다른 선택지가 없다. 돈을 써서 배우겠다는데 받아주는 데가 이렇게 없다니. 대체 어디 가서 내 재력을 과시하나.
일주일에 축구 여덟 번 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