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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비우지 못하던 어머니의 변화, 그 결정적 사건

버리고 비우는 나의 삶과 채우고 쟁이는 어머니의 삶

등록 2022.08.02 11:52수정 2022.08.29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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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의 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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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 elements.envato

 
며칠 전부터 냉장고가 심상치 않았다.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한 거다. 처음엔 밤이 깊어지고 주변 소음이 잦아들면 그 소리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가 말겠거니 했는데 소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졌다. 공장기계 돌아가는 소리로 바뀌더니 나중엔 비행기 날아가는 굉음으로 바뀌었다. 물론 약간의 과장은 섞어 말하면 그렇다는 거다.


새로 산 지 4년쯤 된, 그 정도면 아직 신품이나 마찬가지여야 하는 제품이었다. 게다가 지난해 전 같은 증상으로 A/S를 받은 적이 있었다. 아, 역시 가전제품은 조금 비싸도 그 브랜드를 샀어야 해 하는 후회와 함께 살짝 짜증이 났다. 별 도리 없이 다시 A/S를 신청했다.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담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상냥했다.

그녀에게 전후사정을 말하자 잠시 후 A/S 담당직원과 연결해 줬다. 작년에 오셨던 그 분 같았다. 예의 그 친절한 목소리로 같은 고장이 났으니 얼마나 화가 나셨겠냐며, 자신이 대신 사과하겠다며, 그런데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으나 지금도 너무 많은 환자(가전제품)들이 대기 중이어서 부득이 닷새 후에나 방문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안내해 주었다. 

이 더운 여름에 닷새는 너무 길었다. 하지만 여름 제철을 맞아 가전제품들이 열일하다 줄줄이 쓰러졌다는데, 하나같이 당신의 손길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데 왜 그리 늦냐며 항의하거나 더 빨리 와달라고 특별 대우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런다고 들어 줄리도 만무했다. 여기는 공정하고 투명한 21세기의 대한민국이니까. 

냉장고의 대대적인 다이어트

그래도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소음은 더 기승을 부리고 있어 마음이 급해졌다. 때 마침 주말이었다. 냉장고를 청소부터 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문을 열자마자 대충 고장의 원인이 짐작 됐다. 용량에 비해 보관물이 너무 많았다, 특히 소음의 진원지로 추정되는 냉동실은 조명이 가릴 정도로 식품들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일단 내용물을 다 꺼냈다. 생선과 고기는 물론 떡과 만두까지 얼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망라돼 있었다. 조금 수상해 보이는 것들은 미련 없이 버렸다. 아직 먹을만 한 것은 냉장실로 옮겼다. 이번 주중 조금씩 녹여서 바로 해먹을 요량이었다. 안을 깨끗이 닦고 다시 보관할 것들만 정리해 넣었다. 절반도 채 남지 않았다. 어둡고 음습했던 내부가 훤하게 밝아졌다. 

냉장실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중 삼중으로 식품들이 가득차 있었다. 모두 꺼내 놓고 유통기한 지난 제품들은 모두 폐기 처분했다. 수납받침대를  깨끗이 닦아 다시 끼워 넣고 그 위에 남은 음식물들을 가지런히 놓았다. 음식물들은 맨 앞에 한 열만 남았다. 굳이 그 안까지 들여다보지 않아도 뭐가 있는지 한눈에 알 정도가 됐다.

냉장고의 대대적인 다이어트었다. 오래 됐거나 상한 음식물들은 지방이나 콜레스테롤 같은 존재였다. 불필요한 몸 안의 불순물들을 말끔히 제거한 셈이니 냉장고는 얼마나 시원할까, 보는 내 속도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띵똥띵똥 빨리 문 닫으라는 벨이 울릴 때까지 흐뭇하게 냉장고 안을 응시했다. 물론 그때까지도 굉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날 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냉장고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전에도 모터가 쉬는 시간이면 당연히 소리가 나지 않아 그래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모터가 돌아가고 있는데도 소리가 나지 않는 거였다. 혹시 냉장고가 완전히 사망한 건 아닌지 몇 번이고 문을 열어 봤지만 냉동실도 냉장실도 멀쩡하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도 냉장고는 별 소리 없이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A/S도 취소했다. 과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냉장고는 강도 높은 체중감량 덕에 치유된 듯했다. 자기 한계에 비해 너무 많은 일을 시키니 냉장고가 잠시 거부반응을 보인 것이었기에 그 안을 깨끗이 정화한 것만으로 냉장고는 정상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였다. 자연치유 요법은 냉장고에도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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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 elements.envato

  
버리는 습관과 쟁이는 버릇

사실 어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 가장 많이 부딪친 부분은 그거였다. 어머니는 도무지 버리고 비우지를 못하신다. 뭐든 가득 채워 놔야 안심하신다. 음식물도 유통기한이 지나고 심지어 상했을 지라도 아까운 마음에 쉽게 버리지 못하신다. 이제는 골동품처럼 보이는 비누, 샴푸 따위의 생필품도 집안 구석구석에 고이 쌓아 두신다.

물론 그건 우리 어머니만 그러는 건 아니다. 친구들의 어머니들도 정도의 차이일 뿐 다 비슷했다. 그렇게 뭔가를 가득 채우고 쟁여두어야 마음이 든든하고 안심하신단다. 가난했던 유년기를 관통하며 살았던 궁핍의 트라우마 때문일까. 지금에야 어머니의 그 심정 십분 헤아리지만 처음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내가 미니멀리스트라 유독 더 그랬던 것 같다. 처음 독립할 때부터 어머니의 집에 들 때까지 나는 한 칸짜리 원룸이나 오피스텔을 전전했다. 혼자 사는 공간이 커야할 이유가 없었다. 혼자니 쓰는 양도 적다. 비누 한 장이면 네댓 달을 썼고 4kg짜리 쌀 한 봉으로 반년을 먹었다. 이사도 자주 다녀야 했다. 짐이 많으면 이사가 번거롭다. 되도록 버리고 비워야 했다.

그렇게 나의 미니멀리즘은 선택이 아니라 그냥 운명이었다. 미니멀리즘의 대부로 알려진 스티브 잡스하고는 그 계기가 달랐다. 그는 취향이었지만 나는 그럴 수밖에 없어 그렇게 된 거였다. 또 그렇게 살다 보니 그게 세상 편하다는 걸 일찍이 깨닫게 됐다. 결국 어머니와는 서로 양쪽 극단에 선 격이었다. 심정적 불편함과 갈등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두어 번 부딪치고 나선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다. 내가 내 방식이 옳다고 믿는 것처럼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간청해도 어머니는 당신의 방식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으신 걸 알았다. 그냥 쓸 데까지 최대한 쓰고 그래도 남는 것은 어머니 몰래 내다 버리는 게 현명한 대응이라는 판단에 이른 것이다.

어머니의 깨달음

그런 와중에 터진 냉장고 사건은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냉장고의 고장이 용량을 초과한 보관물 때문이고, 그걸 헐렁하게 비워주니 저절로 비명을 멈추는 기적이 실제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어머니도 그제야 냉장고의 용량초과와 고장률 간의 상관관계에 대해 인정하셨다.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앞으로는 냉장고를 꽉꽉 채우지 않겠다고 단단히 약속하셨다.

냉장고 덕에 내가 판정승을 거둔 셈이었다. 어머니께선 그동안 아무리 말로 해도 듣지 않으셨지만 직접 목격한 기적을 부인하진 않으셨다. 어머니처럼 사람들은 대개 제 눈에 보이는 것만, 직접 경험하고 겪어 본 일만 믿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깨달은 지식은 강렬하게 남는다. 특히 뼈아픈 실수에서 얻은 교훈은 나머지 인생에 크게 영향을 미치곤 한다.

어머니는 이번 냉장고의 기적을 통해 채우고 쟁이는 습관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셨다. 당분간 우리 집 냉장고는 지금처럼 홀쭉한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그게 삼 개월 이상 가면 성공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비관적이다. 어머니는 조만간 종전의 방식으로 되돌아오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은 대개 잘 변하지 않고, 변했다가도 이내 제자리로 돌아오곤 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머니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신데도 나는 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할 것이다. 나는 당신의 믿음과 신조를 존중할 것이다. 그 덕에 나는 어머니께 버림빋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에겐 갈등하고 다툴 여유가 없다. 서로에 대한 좋은 기억만 남기기에도 바쁘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니.
#냉장고 #미니멀리스트 #A/S #어머니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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