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내게 맡긴(?) 돌멩이. 오이지를 지그시 누르고 있다.
한미숙
시엄니의 돌멩이
(시)엄니 방에는 오래된 화초장이 있었다. 보통 4단짜리 서랍장 크기의 장 안에는 엄니의 속옷이나 귀중품 등이 들어있는데 내가 직접 그 서랍을 열어본 적은 없다. 귀중품이라야 서울 큰며느리가 사준 여우털목도리, 셋째 아들 학군장교졸업식 때 받은 기념반지, 또 금빛으로 도금한 비녀나 한복 등일 거라고 짐작되었다.
화초장은 엄니 나이 열여섯 살, 시집올 때 갖고 온 것 유일한 물건이다. 모서리 네 귀퉁이의 은색경첩은 엄니 얼굴에 핀 검버섯처럼 군데군데 푸르게 됐다. 동그란 쇠고리와 잉어모양 자물쇠는 언제 봐도 반들거렸다.
결혼하면서 나는 엄니를 모시고 직장에 다니는 미혼의 시동생 둘을 뒷바라지하며 생활을 시작했다. 첫애가 태어나고 큰시동생이 결혼하면서 분가했다. 둘째를 낳고는 이사를 자주 다녔다. 집안 대소사로 친척들이 모이면 난 엄니 방에서 잠을 잤다. 엄니 방의 오래된 물건들에서 풍기는 냄새가 어둠과 섞이면 편안했다. 실루엣으로 드러나는 물건들이 은근하고 그윽한 서글픔으로 친근하게 다가왔다.
언젠가 엄니로부터 '돌멩이' 얘기를 들었을 때, 난 그 방에만 가면 항상 화초장 어딘가에 있을 돌멩이가 궁금했다. 엄니는 그걸 쉽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때마다 돌멩이는 내 상상 속에서 커다란 바윗돌이 되고 손에 잡히는 조약돌이 되기도 했다. 나는 엄니의 화초장, 그 어느 한 곳에 자리 잡고 있을 돌멩이가 보고 싶었다. 돌멩이는 화초장과 시간을 같이 했다. 돌멩이 하나가 화초장에 모셔진 사연은 이렇다.
엄니는 맏이로 태어나 첫 돌도 되기 전, 생모가 돌아가셨다. 다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맞았다. 당신에게 엄마가 생겼다는 것만으로 너무 좋았다. 동생들 넷이 연이어 태어났다.
엄마 품에 안겨본 기억이 없지만 그 품속이 너무나 그리웠던 어린아이, 동생 옆에서 슬며시 새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질라치면 새어머니는 살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꼬집었다. 칼국수를 썰고 있는 새어머니 옆에서 '국수꽁댕이' 하나만 달라고 했다가 칼을 들이대며 주둥아릴 찢어놓는다는 말에 놀라 울며 며칠을 무서워했단다.
동기간들과 그렇게 구별을 두니 보다 못한 아버지가 어린 딸을 큰집에서 자라게 했다. 아버지는 가끔씩 딸을 보러 찾아왔다. 당시에 읽을 만한 옛날 책, 그러니까 <장화홍련>이나 <심청전> 같은 책들을 갖고 오셨다는데, 그 책 읽는 기쁨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서 거의 외우다시피 읽고 또 읽었다. <심청전>은 언제 읽어도 엄니이야기가 되었다.
큰집에서 자란 엄니 나이가 열여섯 되던 해, 농사를 짓는 양반 가문의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갓 나서 젖배를 곯고 어미사랑도 받지 못하고 큰집 사촌들과 함께 자란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때 아버지가 딸에게 준 것이 돌멩이였다. 엄니가 살던 강가에서 볼 수 있는 흔한 돌멩이, 한 주먹에 꼭 쥐어지는 차돌멩이. 내일이면 시집가는 딸을 불러 아버지가 그 돌멩이를 건네면서 말씀하셨단다.
"이 돌멩이가 말하거든 그때 너도 말을 하거라."
15년 전의 일이다. 앙상하게 구부러진 나무처럼 모로 누운 엄니의 쪽진 머리에서 동백기름 냄새가 났다.
"엄니!"
"왜?"
금방 코 고는 소리를 들었는데 바로 대답이 들렸다. 나는 엄니를 불러놓고 실없이 웃었다. 굽은 몸을 뒤채이며 왜 안 자고 자는 사람을 부르냐고 한다.
"그냥 불러 봤어요!"
"기냥? 음음, 싱겁기는…."
나는 또 엄니를 불렀다. 그리고 지금도 엄니화초장에 그 돌멩이가 있는지 물었다. 엄니는 목소리에 힘을 올리며 말했다.
"그게 그럼 어디 가니? 음음…."
나는 엄니에게 "그 돌, 저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엄니가 말씀하셨다.
"돌멩이가 말하거든 너 줄게."
오이가 담긴 김치통 뚜껑을 열자 돌멩이에 지그시 눌린 오이가 노릇노릇하다. 오이의 수분이 빠지면서 파릇하게 꼿꼿하던 오이가 밤새 나긋해졌다. 위아래 위치를 바꿔서 아직 푸른 기운이 남은 오이를 아래쪽에 놓았다. 노릇한 오이 하나를 먹어보니 색깔만 그럴듯하고 숙성이 덜 된 맛이다.
돌멩이가 말하면 나를 준다던 엄니의 돌멩이는 지금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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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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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지를 담다가 시어머니가 숨겨둔 돌멩이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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