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 후 배수로 뒤의 편백나무 숲
노일영
폭우만 내리면 집 뒤의 작은 배수로 때문에 늘 위험에 처하는 천산댁과 우 이사. 최강욕설 천산댁과 도덕군자 우 이사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절대부자 박 회장. 캐릭터를 보면 이 세 사람은 무협지나 <반지의 제왕>에 나올 법하다.
하지만 이 구도는 현실적으로 너무나 익숙하다. 광대 천산댁과 양반을 갈망하는 중인계급 우 이사, 그리고 이들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력자 박 회장. 잉여 생산물 탓에 계급이라는 게 생긴 뒤로 늘 이어져 온 인간관계의 압축판이라고 할까.
그렇다면 나는 이 관계의 압축판에서 어떤 배역을 맡고 있는 걸까? 이장으로 따진다면 향리 역할을 하는 중인계급 정도일 테고, 프로 골퍼 배역이라면 원형 경기장의 검투사?
내 생각이 세상의 모든 프로 골퍼들을 대변하지 않음을 미리 밝혀 둔다. 나는 항상 투어 경기를 뛰면서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검투사들이 떠올랐다. 내 생존을 걸고 하는 일을 누군가가 보고 있고, 심지어 TV로도 지켜보고 있다.
내가 투어 경기를 생존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경기들이 프로 골퍼들이 지향하는 최종적 경제활동이면서 동시에 기본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투어 경기를 최종적 경제활동이라 함은 좋은 성적을 내서 상금과 후원·광고로도 생활이 가능할 때고, 기본적 경제활동의 토대라고 표현한 것은 대회에서 상위권은 아니더라도 꾸준한 성적을 기록하면, 레슨 시장에서 제법 훌륭한 상품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박 회장과의 담판
아무튼 박 회장의 눈에는 배수로 문제를 의논하러 온 내가 이방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물론 드라이버 비거리가 짧아서 고민이라며 해결책을 물었을 때, 박 회장에게 나라는 존재는 원형 경기장에 들어설 자격이 있는 검투사 정도로 여겨졌을 것이고.
배수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숨겨 둔 비법까지 풀어서 드라이브 비거리에 관해 얘기해 줬는데도, 박 회장은 단호했다. 배수로 공사를 위해 자신의 땅을 제공할 생각이 없다고 박 회장은 딱 잘라 말했다.
"이유가 뭐예요, 박 회장님?"
"제가 그런 이유까지 동네 이장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젠장, 방금 전까지만 해도 노 프로님이라고 부르더니만, 이젠 이장님도 아니고 동네 이장이네.'
"물론 배수로 공사를 할 땅이 회장님의 사유 재산이긴 합니다. 경계가 그렇게 그어져 있으니 회장님에게 그 땅을 내놓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구요. 하지만 그 배수로는 회장님이 매매를 통해 그 땅을 소유하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래서 배수로가 있는 그 땅은 공공적·공익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구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제 앞에서 무슨 경제학 강의를 하는 겁니까, 이장님?"
박 회장은 상당히 불쾌한 표정이었다. 자식들에게 회사를 물려줬지만, 박 회장은 수렴청정을 통해 상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런 박 회장이었기에 고작 이장에 불과한 내가 사유 재산이 어떻고 공익적 성격의 땅이 저떻고, 라고 말하는 게 같잖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배수로 근처에 있는 편백나무들 한 15그루는 잠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공사가 끝나면 다시 심을게요. 이번에 배수로 공사 한번 부탁드립니다."
박 회장은 말없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럽시다, 이장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잠깐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이장님! 자기 집 배수로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그건···,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번 배수로 계약을 따냈다고 무슨 커미션을 받는 것도 아닐 테고, 그렇다고 그 양반들 성격상 고맙다는 말을 할 것도 아닐 거고···. 배수로 공사를 해도 천산댁 그 양반은 계속 불평불만을 하며 욕을 할 건 뻔하고, 우씨는 자연의 이치가 그렇게 흘러서 그렇게 된 거라고 얘기할 건데···."
"그래도 두 분 다 귀엽잖아요."
배수로 공사는 3일 만에 끝났다. 그리고 편백나무들은 공사가 언제 있었냐는 듯 늘 있던 그 자리에서 하늘을 받들고 서 있었다. 박 회장의 예상처럼 공사 기간 내내 천산댁은 공사팀에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리고 우 이사는 우주의 이치에 따라 생길 것이 생겼다고 말했다.
누구도 내게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배수로는 만들어졌고, 두 사람은 이제 폭우가 쏟아져도 집에서 편안하게 두 다리를 뻗고 잠들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걸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