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공보 제1회 졸업생 사진1915년 제1회 언양공립보통학교 졸업생 12명 중에서 7명이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다. 오른쪽 첫째가 김덕수, 세 번째가 서주식이다.(사진, 언양초등학교)
언양초등학교
언양여자청년회가 1924년 1월 창립하였다. 울산여자청년회보다 3년이나 빨랐던 것은 언양지역이 그만큼 빨리 여성인력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언양공보 교사로 언양여자 및 부인야학교사로 활동했던 김덕수가 중심이 되어 지역 유지 부인과 함께 30여 명의 회원을 모아 1924년 1월 19일 오후 7시 여자야학회에서 김덕수의 사회와 정완섭[정인섭]의 창립 취지 설명이 있었다.
초대 회장은 김덕수(金德繡), 재무는 정덕조(鄭德祚), 간사는 이순연(李順連) 정복술(鄭福述) 김영순(金英順)이었다. 정덕조(1910년생)는 상남면 거리 출신으로 상남사립 4년을 다니다가 언양공보로 전학와서 1927년 3월 12회로 졸업하였다. 그런데 정인섭의 셋째 누나 이름이 정덕조이다. 언양공보 졸업생의 나이를 감안해 보면, 정인섭의 누나가 재무를 담당한 정덕조인 듯하다.
정덕조는 정인섭의 <온돌야화>에 '우렁각시', '연이와 계모' 2편을, 정복술은 정인섭의 <온돌야화>에 '독자(獨子)의 고통', '호랑이와 난쟁이', '도깨비 방망이' 3편을 채록하여 제공한 인물이다. 이순연과 정복술, 김영순은 야학출신이거나 지역 부인일 가능성이 크다.
언양공보와 여자야학, 부인야학의 교사로, 언양여자청년회 회장으로 활동한 김덕수는 결혼한 여성으로 언양지역 여성운동의 선구자였다. 과업의 부담감 때문인지 그는 1924년 무렵 교사직을 그만둔 것 같다. 그의 이름이 조선총독부 직원록에서 교사 행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양공보 교사로 야학교사를 하였던 서주식은 1914년 4월부터 1931년 4월까지 근무하였다.
언양불교소녀회가 1924년 9월[4월]에 창립하였다. 1925년 8월에 언양소녀회가 창립하였다. 언양소녀회가 언양여자청년회와 부인회의 영향을 받아 1925년 8월 전후로 만들어졌고, 중남면에는 1924년 하반기에 중남소녀회가 창립되었다. 여성운동이 언양지역에 활성화됨으로 가정교육의 중요성과 함께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났다. 1924년 8월 7일 언양소년회와 언양청년회 주최로 현상웅변대회를 개최하였다. 참가자는 언양지역의 소년·소녀들이었다.
1등은 "참다운 가정교육의 맛을 보여주시오"로 신말찬(신고송), 2등은 "소년부터"로 하창윤과 "광명의 길"로 신근수, 3등은 "여자도 사람이다"의 정복순과 "무엇보다 배워야 하겠다"의 김경택, "여자의 해방" 김두이였다. 웅변의 주제를 보면 소년들은 가정교육, 계몽을 주제로 소년들이 하였다면, 소녀들은 여성의 교육과 해방을 주장함으로 여성의 인권을 강조하였다.
언양소년소녀들 문화운동에 눈을 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