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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우가 세상에 없다고 한 김밥, 여기 있습니다

노밀가루 식단일 때 만난, 내겐 봄날의 햇살 같은 '꼬마 김밥'

등록 2022.09.15 10:49수정 2022.09.1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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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 시민기자들이 '점심시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씁니다.[편집자말]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 스팩트럼 장애를 가진 변호사 우영우의 좌충우돌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드라마에는 우당탕탕 하지만 매력적인 우영우도, 친절하고 다정한 이준호도, 시크한 듯 하지만 따뜻한 봄날의 햇살 같은 최수연도, 권모술수가 넘치지만 결국 착해지는 권민우도, 찐선배의 여러 면모를 보여주는 정명석도, 우당탕탕 우영우 못지 않은 엉뚱한 매력의 동그라미와 털보사장 등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극 중에서 주인공들 못지 않게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다름 아닌 '김밥'이다.

자폐 스펙트럼이 있어 예상치 못한 자극을 어려워하는 영우는 김밥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다 보여서 "믿음직스러운" 음식이라고 한다. 영우의 아빠도 아이에게 이런 저런 음식을 시도해 본 결과 김밥에 정착했을 것이다. 골고루 먹이면서도 아이가 거부하지 않는 음식.


다양한 변주가 가능한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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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은 믿음직스러워요. 재료를 한 눈에 볼 수 있어 예상 밖의 식감이나 맛에 놀랄 일이 없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대사> ⓒ heyfil 출처 Unsplash

 
나도 영우만큼은 아니지만 김밥을 아주 좋아하는 김밥 마니아이다. 주기적으로 한번씩은 꼭 김밥을 먹어줘야 한다. 어린 시절, 소풍 때 친구들과 서로 김밥을 하나씩 맛보자며 나눠 먹었는데 친구들은 나의 김밥에서 본인들이 싫어하는 것을 빼고 먹었다(나는 그때까지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편식은 안 좋은 것이므로!). 저렇게 먹으면 무슨 맛이 날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김밥은 다양한 변주가 가능한 음식이라는 것을, 그리고 집집마다 김밥을 싸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김밥의 세계도 다양해졌다. 분식집 메뉴 한 켠에 자리 잡았던 야채 김밥, 소고기 김밥에 국한되지 않고 참치 김밥, 돈가스 김밥, 진미채 김밥, 땡초 김밥, 샐러드 김밥 등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김밥을 당당히 메인으로 내세운 김밥집들이 생겨났다. 김밥천국은 천원김밥으로 학생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밥을 먹을 수 있는 이른바 분식집의 대명사로 자리 매김 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여러가지 '명품' 김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생당근이 엄청 듬뿍 들어간 김밥이라던지, 계란 지단으로 속을 꽉 채운 김밥이라던지... 정말 김밥의 변신은 무죄였고 그 변주는 무궁무진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는 아빠의 사랑이 가득 담긴 우영우 김밥 뿐만 아니라 우영우가 가출을 감행했을 때 우영우의 친구 동그라미가 만들어준 '네모난 김밥'도 나온다. '네모난 김밥'이라는 표현에서만 봐도 알겠지만 동그라미의 김밥은 변화를 싫어하는 영우가 가출을 한 것만큼이나 틀을 깬 김밥이다.

동그라미의 '네모난 김밥' 속 재료 역시 김밥이 아닌 추억의 도시락에 들어갈 법한 김치 볶음과 계란 프라이를 넣은 이색 김밥이다. 계란 프라이에 볶은 김치에 밥 그리고 김의 조화라니. 딱 봐도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조합이다. 그렇지만 딱히 김밥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우영우의 친구이자 든든한 조력자인 최수연을 우영우는 "봄날의 햇살" 같다고 부른다. 봄날의 햇살 최수연은 역시나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15화에서 혼자 사건에서 배제된 우영우에게 "올 때 뭐 좀 사올까? 오늘은 우영우 김밥 말고 최수연 김밥?"이라며 달래주려고 한다. 거기에다가 대고 우영우는 "최수연 김밥이란 건 없잖아"라고 대답한다.


봄날의 햇살 같은 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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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봄날의 햇살 같은 꼬마 김밥. ⓒ 김지영


나에게는 최수연 김밥이 있다. 봄날의 햇살 같은 그런 김밥이. 한동안 건강 상의 이유로 밀가루를 먹지 않는 노밀가루 식단을 하려고 노력했던 적이 있다. 그 당시 밥 먹을 시간이 빠듯한 어느 날, 컴퓨터 앞에 앉아서 간단하게 후다닥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필요했다.

후보군을 뽑아보니 밀가루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이 없었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의 대표 주자인 샌드위치와 햄버거가 그랬고, 간단한 빵도, 컵라면 등도 모두 밀가루로 점철 된 식단이었다.

그렇다고 차가운 편의점 삼각김밥을 먹고 싶지는 않았고, 떡도 조금만 방치해두면 마르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어묵과 맛살 햄 등에도 소량이지만 밀가루가 들어 있어서 김밥도 제외를 하려던 차에, 사무실 근처 꼬마 김밥집을 발견했다. 그 곳의 꼬마 김밥은 계란, 단무지, 당근만 깔끔하게 들어간 그야말로 노밀가루 식단의 정석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간단하게 집어 먹을 수 있고 먹다가 남겨도 잘 싸두면 나중에 다시 먹을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밀가루가 아닌 밥이라 속이 편안했고, 심지어 참기름 냄새 솔솔 나면서 계란이 폭신함, 단무지와 당근의 아삭함이 어우러져 맛있기까지 했다.

초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점까지, 나는 4개월 정도를 일주일에 한 번씩 그 꼬마 김밥 집에 가서 꼬박꼬박 포장을 해와서 끼니를 해결했다. 그 식당은 요즘 다들 하는 배달앱으로 배달도 받고 있지 않았는데, 김밥을 사러 간다는 핑계로 하루 한번 나가서 걷고 오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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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바쁘지 않은 날에는 봄 햇살을 느끼며 공원 벤치에 앉아 소풍 도시락 먹는 기분으로 꼬마 김밥을 먹기도 했다. ⓒ unarchive, 출처 Unsplash

 
봄날의 햇살을 느끼며 노밀가루 나날들에 봄날의 햇살 같은 꼬마 김밥을 사러 가던 길은 바쁜 하루 중 소풍 같은 기분이 드는 힐링 타임이었다. 가끔 바쁘지 않은 날에는 봄 햇살을 느끼며 공원 벤치에 앉아 소풍 도시락 먹는 기분으로 꼬마 김밥을 먹기도 했다. 

"최수연 김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꼬마 김밥이 떠오른 것도 그때의 봄날의 햇살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요 근래에는 꼬마김밥을 먹지 못해서 그 집 김밥이 먹고 싶어서이기도 하겠지.

나는 더 이상 노밀가루 식단을 지키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김밥은 내가 아주 선호하는 점심 메뉴 중 하나이다. 김밥 한 줄에 떡볶이나 라면, 어묵국이나 쫄면, 비빔 만두 등...  분식집의 그 어떤 메뉴와도 어색함 없이 맞추어 주는 김밥의 넉넉한 포용력을 좋아한다. 속재료를 한 가지만 바꿔도 전혀 새로운 맛의 하모니를 선사해 주는 그 다채로움을 좋아한다. 

며칠 전에도 날씨는 좋지만 몹시도 바쁜 날에, 나는 산책 겸 김밥집까지 걸어가서 돈가스 김밥을 사왔다. 튀긴 고기의 고소함이 당기는 날이었다. 가을 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하는 이 계절에, 바쁜 일이 밀어 닥쳐서 조금은 우울하고 점심 시간도 챙기기 어려운 날이 온다면 가까운 김밥집까지 걸어가보자.

그리고 금방 말아서 아직은 살짝 온기가 감도는 김밥을 한 줄 사와서 먹어보자. 산책으로 기분 전환을 한 후 먹는 김밥은 봄날의 햇살 같은 찰나의 따뜻한 기분을 선사할지도 모를 일이니.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저의 개인 블로그나 SNS 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 시민기자들이 '점심시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씁니다.
#직장인의점심시간 #김밥 #이상한변호사우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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