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팔순기념 가족사진.
최미향
- 논 1000여 평으로 도저히 학교를 못 가르쳐서 안 해본 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어려서부터 커서까지 계속 새끼꼬기를 했지. 외지로 나가지도 못하고 그냥 계속 (새끼) 팔고 그랬지. 그래도 다들 공부도 똘똘하게 잘하더라고. 그 와중에도 심심하면 하모니카도 불고 했어.
내 나이 스무 살에 태안이 집인 아내와 결혼했지. 어머니가 나 군대 가면 혼자 생활해야 하니 입대하기 전에 결혼을 시켜야 한다고 서두른 모양이여. 아이가 배 속에 있을 때 새색시를 모친에게 맡기고 입대했어. 보고 싶다고 올 수도 없는 상황이잖아. 그래도 어머니와 같이 의지하면서 산다고 생각하느냐고 마음은 놓이더라고(웃음).
그런데 어느날 선임이 나를 호출하더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거야. 당시 서울 수도방위사령부에서 근무했는데 외사촌이 아프다고 하면 안 내보내 줄까 봐 그렇게 말했던가 봐. 놀래서 그길로 서산으로 내려왔지.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데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더라고.
그길로 어머니를 안고 이틀 동안 앉아만 있었어. 회한이 일더라고. 그동안 얼마나 아픈 세월을 사셨으면 위암이 다 생겼겠어. 우리 어머니가 불쌍해서 물 한잔을 삼킬 수가 없었지. 너무 불쌍한 삶을 사셨잖아.
사랑하는 남편과 생때같은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됐고, 똘똘한 아들 하나 화상으로 장애인이 됐고. 어디 제정신으로 사셨겠어? 거기다 국민학교도 졸업 못 한 아들은 자식과 아내를 떠나 군대에 가 있지.
남들처럼 마음껏 먹고 웃지도 못한 우리 어머니가 너무 가엾어서 내리 안고 있어도 힘든 줄도 몰랐어. 어머니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가 없었거든. 멀쩡한 모습 보고 입대했는데 하루아침에 돌아가시게 생긴 서러운 어머니였어.
내 얼굴 보려고 기다리신 건가 봐. 이틀 만에 돌아가시더라고. 그때가 음력 5월 15일이었어. 따뜻한 봄 날씨였지. 바람도 간간이 불고. 언덕 위 양지바른 곳에 어머니를 묻고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발이 안 떨어지더라고.
그렇게 아내와 젖먹이 아들을 어머니 떠난 집에 남겨두고 나는 다시 군대로 돌아왔지. 남은 시간을 무슨 정신으로 보냈는지 몰러. 지금이야 전화도 있고, 통신도 발달했지만 그때는 그게 어딨어. 그냥 온종일 걱정으로 시간만 보냈지.
시간이 약이란 말이 맞더라고. 전역을 했고, 5남매가 태어났어. 또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지더라고. 살면서 여러 가지 일들이 스쳐 지났지. 고생만 하던 내 아내도 결국 젊은 나이인 48세에 5남매를 두고 하늘나라로 떠나 버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