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식 부평문화원 이사가 신촌로 옛사진을 들고 있다. 사진 속 'Key Club' 자리엔 지금 장순일음악연구소가 들어서 있다.
유승현 포토 디렉터
인천 부평은 굴곡진 근현대사의 아픔을 옹이처럼 품고 있다. 1939년 군수기지인 일본 육군 조병창이 부평에 들어섰고, 1945년 광복 후 미군은 그 땅을 접수하고 미군수지원사령부(ASCOM)라는 간판을 단다.
부평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거대했던 도시, 애스컴 시티. 그곳에서 나온 풍부한 일자리와 물자를 좇아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부대 밖도 미군들을 위한 도시가 됐다. 신촌에만 외국인 전용 클럽이 스무 곳 넘게 성업했다.
신촌의 주도로는 '신촌로'였다. 신촌교에서 신촌성결교회까지 이어진 길 따라 음악 클럽, 약국, 양장점, 사진관, 미장원, 양키 상점, 시장이 번성했다. 하지만 애스컴 시티가 해체되며 사람들이 떠나갔다. 오늘 그 길에는 신촌에 단단히 뿌리내린 토박이들과 새 숨을 불어넣는 문화예술가들의 일상이 공존한다.
전쟁이 만든 도시, 신촌 사람들의 삶
신촌에서 나고 자란 이상배(75)씨의 삶은 미군 주둔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이씨는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에도 신촌엔 없는 게 없었다"며 "미국 사람, 미국 음악과 물건이 흔해 서 사람들이 국제도시라고 불렀다"고 회상했다.
영어 간판과 형형색색의 불빛, 달러가 넘쳐나던 신촌. 이곳은 한국전쟁 이후 부평 사람들의 생계를 지탱해 주던 '아메리칸 타운'이었다. "화려했어요. 미군들이 10불이고 100불이고 나와서 쓰니까 돈이 돌았어." 클럽, 미용실, 세탁소, 양장점, 사진관, 목욕탕... 미군을 대상으로 한 가게가 골목마다 성업을 이뤘다. 클럽 뒤편에는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들이 사는 단칸방이 밀집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이 집(지금 살고 있는 집)도 짓고, 요 앞에도 짓고 주변에 많이 지었어요. 방이 없어서 세를 못 줄 정도였어요."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미국의 외교정책 '닉슨독트린'에 따라 1973년 애스컴 시티는 해체되고, 캠프마켓만 남았다. 부평 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부대가 10분의 1로 쪼그라들자 도시가 멈춰섰다. 가게 불이 꺼지고, 사람이 빠져나갔다. 원주민만 텅 빈 마을을 지켰다. "떠날 생각이 있었지만 부모님이 여기 계시다 보니 고향에 남게 됐어요."
부평구 신촌로 30. 70년 전 할아버지가 지어준 집은 현재 이씨의 사업장이다. 마을 사람들과 배추를 절여 판다. 주변은 많이도 변했지만, 단단히 뿌리내린 신촌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성실하게 삶을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