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정치학교에서 수강생들이 토론하는 장면.
노회찬재단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이라도 남이 되어 본 경험을 해 보셨나요? 나의 눈이 아니라 타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떠한 모습일지 상상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런 경험을 해 보면 나에게 어떠한 변화가 생길까요? 아니 더 나아가 실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어떠한 변화를 맞을까요?
노회찬정치학교를 수강했던 분들은 공통으로 타자가 되어본 게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타자 되어보기', 이것은 훌륭한 정치인이 되기 위해 필수적인 경험이라 생각합니다. 정치는 공적인 삶의 영역입니다. 물론 정치뿐 아니라 우리 활동의 많은 영역이 공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곳은 낯선 이들이 서로 마주치는 영역입니다. 그중에서도 정치는 화해하기 어려운 대립이 일어나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대립이야말로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대부분 정치인은 이 대립의 상대를 근대적 이성의 힘으로 이기려 합니다. 상대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이성의 논리로 격파하여 상대를 이기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세상의 변화가 이루어졌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지만 갈등과 대립을 해결하는 방식에는 또 다른 계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공감입니다.
억눌리는 목소리를 해방하는 것이 정치가의 임무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관점에서는 공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날 선 대립의 언어가 서로 맞부닥칠 따름입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상대에게서 동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상대가 바라보는 지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의 목소리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목소리들은 때로는 화음을 이루기도 하지만, 대개는 불협화음으로 존재합니다. 다양한 목소리가 화음을 이루면 좋겠으나, 그렇다고 반드시 하나의 선율을 고집할 건 아니라 봅니다. 사회 안에 목소리의 복수성을 인정하고, 다성음악(polyphony)처럼 긍정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목소리의 복수성을 인정하더라도, 억눌리는 목소리가 있으면 그것을 해방하는 역할이 정치가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요즈음 정치를 보면 마치 경마장을 달리는 말과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도대체 누구 편인지도 알기 어려운 함성에 자극받아 호흡을 가다듬을 여유도 없이 무조건 앞을 향해 달리는 경주마들의 경쟁이 벌어집니다. 오직 승리만이 모든 것을 보상할 것이기에 세상은 단순한 논리로 재구성되고 직선적인 사고만 지배합니다.
하지만 억눌린 목소리는 구불구불한 골목 곳곳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권력이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 있는 사람들, 6411 투명인간의 목소리는 함성에 섞이지 못합니다.
노회찬정치학교는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으면서도 권력 자원이 없어 그 존재가 가려진 이들을 해방하고자 하는 분들이 함께하는 공간이 되려 합니다. 차이를 긍정하고 바로 그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구상하는 분들이 모였으면 합니다. 말 한마디가 세상에 울림을 줄 수 있기를 희망하는 분들이 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