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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 휴가제' 있는 명절 어떠십니까

추석 '희망편'과 '절망편'

등록 2022.09.23 11:46수정 2022.09.23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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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추석 절망편'이다. 우리 집 추석 이야기다. 지난 추석, 남편은 전날 일이 있어 먼저 시댁에 가고 나는 금요일 오후 기차를 타고 갔다. 큰애는 교환학생으로 스페인에 갔고 작은애는 군대에 갔으니 애들 없이 맞는 첫 명절이었다.


형님 집에 도착해보니 조카들이 안 보였다. 큰 조카는 베트남에 간 지 3년이 넘었는데, 추석 때 온다더니 한 달 뒤로 미뤄졌다고 하고, 작은조카는 오빠 들어오기 전에 베트남 여행을 한다며 어제 떠났단다. 큰 조카가 이미 서른이 훌쩍 넘었고 우리 작은 아이도 스물이 넘었으니 독립하는 게 당연하고 부재할 수도 있다. 그래도 명절인데... 애들이 아무도 없이 어른들만 남은 풍경이 묘했다.

우리는 차례를 지내는 것도 아닌데 명절이면 항상 전과 만두를 한다. 명절 분위기도 내고, 형님의 만두가 워낙 맛있어서 모여 만두를 빚는 것이다. 만들면서 먹고 명절 내내 먹고 남은 건 바리바리 싸오곤 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을 다 부치고 마지막 판이 익어가고 있었다. 남편은 막 나온 전을 내 입에 넣어주며, "이거 내가 다 한 거야. 내가 아침부터 만두 속 다지고 버무리고 전까지 부쳤어"라고 웃으며 말했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남편이 그러니 형님과 시누이의 행색은 말해 뭐하겠는가(결혼하지 않은 시누이가 있는데, 명절이건 아니건 언제나 큰 역할을 하신다). 주방에는 아직 손도 대지 않은 만두 속이 커다란 대야 가득 버티고 있었다.

아주버님이 만두피를 밀고 남편과 내가 만두를 빚고 형님이 만두를 쪄내고 시누이는 커피를 타는 등 시중을 들며 왜인지 모르게 자꾸 나오는 설거지를 했다. 만두를 쪄내는 족족 먹어치우는 먹성들이었는데, 이번에는 만두가 남아돌았다. 먹지도 않는 만두를 계속 만들다 형님은 반쯤 남은 만두 속을 치워버렸다.


어머님은 소파에 앉아 우리를 바라보았다. 명절이면 미리 음식 준비를 싹 해놓으시던 분인데, 무릎 수술을 한 후 주방에 서 있기만 해도 딸에게 야단을 맞았다. 사실 어머님만 그런 게 아니라, 형님도 교통사고로 무릎이 망가져 몇 번에 걸쳐 시술도 하고 수술도 했지만 여전히 절뚝거리는 신세다.

바닥에 쭈그리는 건 절대 못하는데 음식 하는 게 어디 그렇게 되나. 무언가를 들었다 놨다 하느라 '에고고' 소리를 달고 다닌다. 시누이는 퇴행성 관절염인데 며칠 전부터 퉁퉁 붓기 시작해서 지금은 발가락까지 아프다고 한다. 나야 원래 부실한 몸이라 애초에 열외였고. 만두를 빚는 내내 우리는 절뚝거리고 끙끙거리는 몸뚱이에 대해 기막혀하고 한심해했지만, 음식을 그만할 생각은 아무도 안 했다.

한탄이 끝나고 우리는 저녁밥을 해 먹었다. 전도 먹고 만두도 먹었지만 여전히 밥과 국을 먹어야 한다는 어떤 사명감이 있다. 아침부터 토란 까고 고기 육수 내어 토란국을 미리 끓여 놓았으니 그나마 손쉬웠다.

밥상머리 대화는 툭툭 끊겼다. 반주를 곁들였지만 안주거리 삼을 만한 소재가 없었다. 각자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 슬그머니 소파로 방으로 갔다. '설거지옥' 앞에 서서 어쩌면 인류는 다음 세대를 보는 맛에 살았던 거 아닐까, 열적은 궤변을 떠올렸다.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명절 음식을 다 같이 해 먹는 즐거움을 운운하며 서로의 뼈와 살을 갈아 넣을 수 있을까. 언제까지 3대, 4대가 다 모이는 명절을 상상하며 살까. 우리에게 다음 대라는 게 있기는 할까. 다음 대가 없어서 이 모양이 되어버린 걸까, 이 모양이어서 다음 대가 없는 걸까.

이러다가 한 해 두 해 흰머리만 늘고 연골만 닳으면서 고스란히 오늘을 반복하며 늙어가는 건 아닐까. 여전히 꼬치를 꽂고 만두를 빚는 내 모습을 상상하다 오싹해졌다. 이런 미래를 예상하지 못한 게 더 이상한 일이다. 고령화 사회라고, 출산율이 바닥을 치고 있다고 그토록 떠드는데.

다음 날 아침 눈 뜨자마자 결단을 내렸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자. 다행히 기차표가 있었다. 다들 아쉬워했지만 안도하는 티를 감추지 못했다. 다음에는 음식도 하지 말자는 말은 끝내 하지 못했다.

지인이 기획한 추석 이야기

다행히 '추석 희망편'도 있다. K와 전화 통화를 했다. 각자 어떤 기막힌 명절을 보냈는지 확인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시간이다. K는 맏딸이며 맏며느리다. 맏이라고 하여 모든 권한과 책임을 다 지는 건 아니지만 K는 기꺼이 그 두 가지를 다 지고 산다.

20년 넘게 시부모의 생활비를 대고 대소사를 챙겼으며 시부모의 고집에 맞서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는 역할을 한다.

두 명의 동서가 있는데, K는 가급적 그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려 나름 노력해왔다. 그래 봤자 K의 입으로 듣는 이야기니 동서들의 마음은 다를 거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해왔다. 막내라서 편한 것도 있지만 막내니까 불편한 것도 없잖아 있을 거라 생각한 거다.

K는 동서들과 차례로 돌아가면서 음식준비를 한다. 주로 반찬가게에서 사 오거나 온라인 주문을 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반찬통에 담아오는 성의를 보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시댁으로 배달을 시키는 걸 보면서 마음이 좀 불편했지만 K도, 시어른도 곧 익숙해졌다.

이번에는 둘째 동서 차례인데, 마침 시동생이 싱가포르에 나가 있었다. 남편도 없는데 명절이라고 시댁에 가야 하냐고 묻더란다. 그것도 그렇겠다 싶어서 그럼 돌아가면서 휴가를 갖자고 했단다. 싱가포르에 가서 남편이랑 놀다 오라고 했더니 '에이 남편이랑 노는 거 재미없어요, 형님이랑 같이 가고 싶어요' 하더란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하는 소리라기에는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 실현 가능하므로. 그렇다면 진심이라는 건데, K 말대로 정말 편하고 좋은 형님 노릇을 해온 거다.

K는 곧 며느리 휴가제를 도입할 생각이다. 이번 추석에 예행연습을 했다. 차례 준비를 남편과 자식들이 하게 했다. 어차피 음식은 배달되어오니까 접시에 담게 하고, 과일을 깎게 하고 상위에 올리게 했다. 아이가 멜론을 어떻게 깎느냐고 묻기에 인터넷 검색해봐, 했더니 그때부터 모든 것을 묻지 않고 검색으로 해결하더란다. 다음 명절에는 며느리들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까지 자연스럽게 주입시켰다.

차례를 마치고 K는 어른들 모시고 집 앞 카페에 갔다. 가겠다는 사람만 가고 안 가겠다는 사람은 두고. 파라솔 아래 앉아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데, 다들 핸드폰만 보더란다. 시아버지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K가 말했다. 그래도 따라오는 게 어디예요, 요즘 어른 따라다니는 애들 없어요. 시아버지도 그건 그렇다, 고개 끄덕이더란다.

이왕 나온 거 드라이브라도 하자는 걸 K가 막아섰다. 길이 얼마나 밀리는데요. 자 이만 해산! 그 길로 각자 집으로 갔다.

나는 조금 감동스러웠다. "K야, 네가 미래다" 했더니 K는 "아냐, 내 동서들이 미래야. 걔네들이 말해주지 않으면 나는 몰라" 한다. 그래, 네 귀가 보배다.
덧붙이는 글 브런치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추석 #명절 #음식 #비혼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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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늘 무언가를 추구한다. 거실에는 모임이 끊이지 않았고 학교와 마을에서 사람들과 온갖 작당질을 꾸몄다. 정해진 궤도에서 벗어나기를 좋아해서 지금은 갈무리하지 못한 것들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쓰고 그리는 일을 한다. 에세이, 그림책, 소설을 넘나들며 막무가내로 쓴다. 깨어지고 부서진 것들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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