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인권상담소다산인권센터는 1992년 김칠준, 김동균 합동법률사무소 한켠 다산인권상담소로 첫발을 내디뎠다.
다산인권센터
다산인권센터와의 인연은 꽤 오래됐다. 90년대 학생운동 시절부터 연행이나 구속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문을 두드렸던 곳이 다산인권센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다산인권상담소'였기 때문이다. 1992년 김칠준, 김동균 변호사가 수원지방법원 앞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면서 노동 사안과 법률지원활동을 시작한 게 그 시작이었다.
지역의 학생 운동가들, 노동운동가들, 철거민들이 수도 없이 잡혀갈 때 부리나케 연락하고 달려가는 곳이 바로 다산인권상담소였다. 그 상담소가 변호사 사무실에서 '다산인권센터'라는 인권단체로 독립한 해가 2000년. 그 해 나는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수원의 작은 환경운동단체 활동을 시작한 때였다.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다산인권센터가 발행한 '팩스신문'이었다. 일주일간의 인권소식을 빽빽이 담아 언론사를 비롯해 팩스가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발송하는 신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신문 발행을 위해 활동가들이 밤을 새워가며 글을 쓰고 편집하는 모습이 딱하기도 했고, 멋지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팩스 신문은 인권운동사랑방의 '인권하루소식'이 먼저였고, 주간도 아닌 '매일' 발행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들을 했는데, 누가 먼저 어떻게 시작했던 간에 '인권활동가'의 이미지는 그런 헌신적인 모습, 그 자체였다.
다산인권센터와 본격적인 연을 맺은 활동은 아마 '수원반전평화연대' 활동으로 기억하고 있다. 수원공군비행장내 미군의 열화우라늄탄 논란과 함께 이라크 파병문제까지 이어지면서 지역사회에서 반전과 평화의 목소리를 모아내는 활동을 전개했다.
내가 일했던 환경단체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수원역 광장에서 '길바닥 평화행동'을 진행하면서 다산인권센터 활동가들과 점점 깊은 관계를 맺어나갔다. 수원반전평화연대 뿐만 아니라 지역의 무슨 대책위만 구성되면 빠지지 않는 단체가 다산인권센터였다. 하긴, 이 세상에 '인권사안'이 아닌 문제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수년 동안 지역에서 함께 연대활동 차원으로 만나던 다산인권센터를 2011년 마흔살 새내기 활동가로 들어갔다. 사건만 터지면 성명서 쓰고, 대책위 구성하고 기자회견하고, 현장에 달려가 인권침해 피해자 인터뷰와 농성을 하게 되면 농성장 지킴이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래도 부족했고, 해결되지 못한 사안들이 많았다.
굵직굵직한 사안들은 정부와 국회를 움직이지 못하면 결국 바위에 계란치기. 국가보안법폐지 투쟁,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싸움이 그랬고, 쌍용차 싸움이 그랬다. 밀양 주민들의 송전탑 싸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바위에 계란이라도 제대로 던지기 위해 무던히 애썼고, 이기고 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건의 피해 당사자들, 그들과 연대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의 일상과 피해회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