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우들을 위해 특수 제작된 교구들을 일본에서 가져와 아동의 발달 교육에 힘썼다.
하라다 쿄꼬
또한 2002년 6월 1일(토)의 일기에는 "가톨릭 복지부 꽃동네에서 매월 내고 있는 소책자 '꽃동네 소식'에 나를 소개한다고 이력서를 써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동경했으며 존경의 마음을 품어왔습니다. 그러나 해방전 일본은 식민지 지배로 한국과 한국인에게 커다란 죄를 범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사죄드립니다. 사죄를 위해 한국의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봉사해야겠다는 마음을 오래전부터 꿈꿔 왔습니다. 지금 꽃동네의 중증 장애아들을 돌볼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합니다. 일본과 한국이 앞으로 사이좋은 나라가 되길 원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한국 방문 동기를 솔직하게 써놓고 있다.
어쩌면 위 글이야말로 하라다 이사장이 한국과 한국인에 갖고 있는 알맹이 '심정'이 아닐까 한다. 하라다 이사장은 일본에서 사회과 교사를 하다가 장애아 학급을 담당했고 이후 양호학교로 옮긴다. 특히 중증 상태의 장애아들을 맡으면서 '장애아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혼자서는 밥을 먹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옷도 입을 수 없는 아이들, 초등생의 나이가 되어도 기저귀를 차고 있어야 하는 장애아들을 일본에서 보살핀 경험이 있어 꽃동네에서도 하라다 이사장은 중증 장애아들을 맡았다.
처음에 꽃동네에 왔을 때 동료 봉사자들은 "일본인이 왜 이곳에?"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역시 한국인은 일본인을 싫어하고 있구나'라는 직감을 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니까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각오가 섰다고 했다.
하라다 이사장은 꽃동네 장애인들로부터 '하라다 이모'로 불렸다. 한국말을 미리 배워 둔 덕에 일상생활에 대한 소통은 그런대로 가능했기에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 쏟았다. 그 결과 '하라다 이모'는 꽃동네서 인기 만점의 '보모 아줌마'였다. 특히 중증 장애아들의 교재 교구와 장남감 등을 일본에서 지원 받아 아이들에게 적용시키는 등 장애인들이 교육에도 최선을 다했다.
한편, 서로 어색하던 동료들과도 마음을 터놓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쉬는 날 하라다 이사장을 데리고 한국의 명소 구경을 시켜주었고 집에 초대해 맛있는 한국 음식도 만들어 주는 등 서로간의 우정을 나눈 이야기들을 읽노라면 하라다 이사장이 평생 꿈꾸던 '한국인들과의 화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나누는 것 같아 독자의 한 사람으로 기뻤다.
"일본인이 먼저 사죄해야" 하라다씨의 신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