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비거니즘을 '무해한 삶으로 나아가는 소박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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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편지지와 전범선이 한 단락씩 번갈아가며 쓴 서로 만나서 사는 이야기, 비거니즘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다. 전범선의 글 다음에는 편지지가 쓴 채식 레시피가 정갈하고도 맛있어 보이는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그러니까 비거니즘에 대한 에세이이자 실용적인 비건 요리책이기도 하다.
편지지는 결혼이란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비효율적인 시스템이라고 생각해 결혼을 거부하는 비혼주의자이다. 전범선은 비혼주의자까지는 아니지만 결혼에 뜻이 없고 아이를 낳을 생각도 없다. 저출산이 문제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지구 환경을 위해서는 비출산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편지지는 과거 1년 이상 계속된 데이트 폭력으로 신경쇠약, 우울증 등과 함께 심각한 건강상 문제를 겪게 되었는데, 고기와 유제품을 자제하라는 의사들의 공통적인 권고에 따라 육식을 중단했다. 그 결과 기적적으로 병이 호전된 편지지는 채식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동물권에 눈뜨고 비건이 되었다.
편지지에게 페미니즘은 가부장제 사회를 마주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고, 세상과 공존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비거니즘을 통해서는 그 고리를 확장해 종을 아우르는 평등을 꿈꾸고 사랑의 의미를 배운다.
전범선은 그룹 '양반들'이라는 밴드의 보컬이자 동물권 운동가다. 대학 동기 대부분 금융, 컨설팅, IT 관련 기업에 종사할 정도로 잘 나가고 있다. 자신도 미국 로스쿨에 합격해 같은 길을 갈 수 있었지만 진학을 포기하고 예술가가 되기로 했다. 자사고 출신에 아이비리그 유학까지 다녀온 금수저로 알려진 그는 글쓰고 노래하는 삶을 택한 후 대출금과 월세, 카드 값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두 사람은 비거니즘을 '무해한 삶으로 나아가는 소박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비거니즘은 누구도 해치지 않는 삶, 서로 돕고 돌보는 삶이다. 비거니즘은 단지 채식주의가 아니라 '동물권에 기반한 윤리철학'이다. 인간동물과 비인간동물은 자연의 일부로서, 생태의 구성원으로 공존하기에 동물의 건강이 곧 우리의 건강이다.
특히 전범선은 모든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그 밑바닥에 비인간동물이 있기에 비거니즘이 동물, 여성, 노동, 생태, 기후 등 진보 정치를 통합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는다. 비거니즘은 탈육식이기 전에 죽임 반대, '살림', 즉 살리는 철학이자 살리는 운동이다.
살림은 정복과 착취를 자행하며 무한한 성장을 추구하는 경제가 아닌 생명의 지속과 행복을 목표로 하는 탈성장이다. 살림은 여성의 할 일로 폄하되어온 생명을 돌보고 먹거리를 챙기는 일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는 '밥상에서 시작하는 혁명', 페미니즘이다.
여기까지 보면 전범선은 철저한 페미니스트 비건이다. 그런데 정작 두 사람의 살림살이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정리 정돈, 요리, 청소에 진심인 편지지와 달리 전범선은 배달음식과 가공식품으로 끼니를 때우고 집안 살림은 늘 뒷전이다.
그러니까 전범선의 비거니즘은 '편지지의 노동'에 기대고 있는 셈이다. 이 불균형으로 편지지는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헤테로섹슈얼 남성은 결국 어쩔 수 없는가라고 한탄한다.
지구와 생명을 살리는 실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