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할매와 동물 4총사가 지키는 지리산

나의 생존과 지구를 위해 OOOO을 약속합니다

등록 2022.10.10 12:07수정 2022.10.11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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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어서 그들이 향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그리고 술과 안주를 몇 가지 고르고 계산을 마친 후, 편의점에서 주는 대로 받아와 테이블에 펼쳐놨다. 그런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영씨가 씩씩한 목소리로 내게 한마디 말을 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한테 수저가 있어요. 나무젓가락은 다시 반납해도 되겠어요."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모습이었다. 예전 꽤나 열심히 활동했던 단체에서는 대부분이 그렇게 했으니 당연하게 보였던 것이, 한 달 전 그날엔 무척 신선하고 흥미롭게 보였다.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환경실천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개인 수저와 그릇을 들고 다녔던 나였지만, 산골마을로 귀촌해 예전에 활동했던 단체와 물리적·심리적 거리가 멀어진 지금은 텀블러와 손수건 정도만 가지고 다니는 정도로 환경실천에 소홀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날 본 모습은 반가움을 넘어 신기해 보일 정도였다.

산내에서 가장 유명한 그들은 굳이 시간과 장소를 약속하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매일같이 함께 어울려 새로운 일을 도모하기 좋아하는 그들을 만나려면, 초저녁엔 이 마을에 몇 군데 없는 술집을 둘러보면 되고, 자정 무렵엔 두 개밖에 없는 편의점에 가보면 된다.

지리산 안쪽에 자리 잡은 산내 마을은 겨우 2100여 명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지만, 철학이 있고 재능이 넘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어울려 활동하는 동아리가 60개가 넘을 정도로 활기가 넘치는 결코 작지 않은 마을이다. 그중에서도 그들은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동아리 가운데 하나인 산내놀이단 소속으로, 이 마을의 어르신들에게는 배우로 불리는 아주 인기 있는 사람들이다.

한 달 전 모처럼 들른 마을 술집에서 우연히 그들을 만나 술자리를 함께 했다가, 그들이 도모하고 추진하고 있다는 환경축제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그들의 계획에 조금 놀라 물었다.


"환경축제요? 지난 봄, 여름에도 환경을 주제로 내내 연극을 했잖아요? 좀 쉬어야 겨울에 어르신들과 함께 제대로 놀 수 있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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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봄 부처님오신날, 산내놀이단의 실상사 공연. 마고할매의 든든한 지원을 받은 동물 사총사가 지리산의 깨끗한 환경을 파괴하려는 악당들을 물리치고 있다. ⓒ 장진영

 
수달: "처음엔 악당들이 무서웠는데 할머니가 우리 곁에 계셔서 나중엔 힘이 났어요."
비둘기: "정말 우리가 악당들을 물리친 거예요?"
마고할매: "그래, 너희들이 힘을 합쳐 지리산을 지켜낸 거란다."

지난 5월 부처님오신날, 실상사에서는 환경을 파괴하려는 악당과 그로부터 지리산의 깨끗한 자연을 지키려는 마고할매와 동물 사총사의 활약상을 그린 산내놀이단의 공연이 있었다. 공연은 생각 이상으로 큰 호응을 얻었고, 취지에 공감한 이웃 읍면에서도 공연 요청이 들어와 처음 계획보다 더 많은 공연이 이뤄져 생업이 따로 있는 그들이 농번기에 감당하기엔 벅찬 활동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산내놀이단은 농한기인 겨울철, 시골 어르신들의 무료함과 외로움을 이용해, 건강보조식품 등을 비싸게 팔고 달아나 버리는 약장수로부터 어르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귀촌인들이 주축이 돼 만든 극단으로, 8년 전 처음 만들어진 이래 코로나 이전까지만 해도 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신파극을 주로 만들어 겨울에만 활동하던 단체였다.

하지만 올해는 전 연령대를 대상으로 1년 내내 환경운동에 집중하고 있다. 낮에는 농사를 짓거나 집을 짓는 곳에 나가 일하는 사람들이, 밤에는 대본 연습에, 또 주말엔 공연을 하면서 봄·여름을 다 보냈는데, 가을이 시작되자마자 환경축제를 연다고 하니, 이들의 열정과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력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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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존과 지구를 위해 __________을(를) 약속합니다. 축제에 참가한 아이들이 스스로 약속한 환경실천 내용을 손수건에 적고 있다. 손수건을 받아 간 아이들은 그 내용을 다른 친구들에게 공유하고 꼭 실천할 것임을 다짐했다. ⓒ 장진영


"옆에 있는 재향이를 보면서 저도 얼마 전부터 개인 수저를 들고 다니고 있어요. 우리 놀이단은 환경단체는 아니지만, 이제는 그런 것 구분 없이 모두가 환경실천가가 되어야 하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이소영(산내놀이단 음향)

"지금은 기후위기의 시대를 넘어 기후재앙의 시대라고 봐야 합니다. 우리 마을에도 환경을 기치로 다양한 모임과 활동들이 있지만, 이러한 활동들이 마을 전체로는 확대되지 못했다는 느낌입니다. 개개인이 개별적으로 하는 환경실천이든, 단체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하는 환경운동이든, 우리 마을에서 환경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 서로 응원하고 새롭게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동시에 아직까지 환경실천에 소극적인 사람들에게는 환경의 중요성을 홍보하고, 실천 약속을 이끌어 내는 장을 만들어 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 축제를 기획했습니다." -윤여정(산내놀이단 연출 겸 배우)


"축제에 참여하는 모두에게 손수건을 나누어 주고, 거기에다 자신이 당장 할 수 있는 환경실천 약속을 적어 보라고 할 겁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과 그 내용을 공유하고, 서로 응원하게 하려고 해요. 또 축제에 오시는 분들에게는 개인 수저와 그릇을 필히 지참하고 오시게 홍보할 거예요." -용춘란(산내놀이단 교육부장 겸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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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지는 플라스틱 용기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이곳 환경단체인 비니루없는점빵은 판매부스에 벌크 제품을 비치했다. 주민들은 각자 들고 온 용기에 친환경 세제를 필요한 만큼만 담아 갔다. ⓒ 장진영

 
이곳 환경단체인 '협동조합 비니루없는점빵'의 활동가이자 지난 5월 실상사 공연에서는 마고할매 역을 맡았던 이재향씨도 한마디 거들었다.

"소영 언니가 말한 것처럼 이제는 모두가 환경실천가가 되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저희 같은 환경단체만의 노력으로는 지금의 위기를 타개할 수 없어요. 그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산내놀이단이 앞장서서 환경축제를 연다고 하니 정말 고맙고 기대가 됩니다."

환경실천은 다른 활동에 비해 시작하기는 쉽지만 지속하기는 참 어렵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만약 누군가가 오늘 환경을 오염시키더라도 그 행위의 결과는 한참 뒤에야 나타나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 여겨진다.

시골은 소각하지 않아야 할 물건들을 태워 버리는 경우가 여전히 빈번하게 일어나며, 그것으로 인한 이웃 간의 갈등도 여전하다. 오늘 아침 무심코 태운 쓰레기로 인해, 시차 없이 나와 내 가족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그렇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늘 아침 무심코 사용한 나무젓가락과 미세플라스틱 덩어리인 물티슈로 인해, 그 즉시 내 건강과 이웃의 건강이 나빠진다면, 역시 이런 일회용품을 사용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환경오염으로부터 오는 피해는 상당한 시차를 두고, 공간마저 뛰어넘어 발생하기 때문에 깨어있지 않으면 문제를 인식하기가 참 어렵다.

이제 환경을 지키고 개선하는 일은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일이 돼 버렸다. 우리를 포함한 뭇 생명들의 삶이 먼저 지속가능해야, 다른 가치들도 그 바탕 위에서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이번 산내환경축제를 계기로 다시 개인 수저와 그릇을 들고 다녀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우리는 모두 실천가가 되어야 한다는 한 달 전 술자리에서의 말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맴돌 것 같다.

드디어 축제가 시작됐다. 그리고 모든 생명과 더불어 잘 살기 위한 지리산 산내 마을의 약속도 다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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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2부 행사인 환경을 주제로 한 공연은, 산내농악단과 마을 주민들의 풍물놀이로 시작되었다. 환경보호 표어를 적은 깃발은 종이박스를 이용해 만들었다. ⓒ 장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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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공식 명칭인 산내는 발음이 어려워,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이곳을 살래라고 불러왔다. "살래!"는 우리의 삶이 위협받는 지금과 같은 기후위기 시대에 어쩌면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 장진영

#산내환경축제 #기후위기 #산내놀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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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백 년 가까이 서울에서만 살다 2018년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마을로 이사를 했다. 해가 있을 때는 실상사에 있고 해가 없을 때는 술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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