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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하면서 중ㆍ고교 다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 4] 필경 일 때문에 학교공부 시간을 빼앗겨 고민이 많았다

등록 2022.10.17 15:33수정 2022.10.17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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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제1차 회의가 18일 오후 서울 수송동 수송빌딩 회의실에서 공동위원장인 이해찬 총리와 한승헌 변호사를 비롯한 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제1차 회의가 18일 오후 서울 수송동 수송빌딩 회의실에서 공동위원장인 이해찬 총리와 한승헌 변호사를 비롯한 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11세에 해방을 맞았다. 아직 역사적ㆍ민족사적 해방의 의미를 이해하기는 어린 나이였지만 당장 우리말을 되찾고, 송진 채취하는 일이 그치고, 방공호로 피신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도 해방의 덕이었다. 

아버지가 이제 한문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 낮에는 전학가기 전의 그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서당의 훈장에게 한문을 배웠다. 7~8명 되는 학동들과 좁은 방에서 열심히 한문공부를 한 것이, 뒷날 밑천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소년은 거창한 '청운의 꿈'이나 '야심' 같은 것 없이 농촌에서 부모님 모시고 평범하게 살고자 했다. 그래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부모님의 생각은 달랐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농삿꾼으로 묻힐 수 없다는 것이다. 설득으로 다시 전주의 숙부 댁으로 가서 전주북중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교사가 되길 바랐던 부모의 뜻에 따라 전주사범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2차로 합격한 것이다. 

집에서 학자금을 보내 줄 형편이 아니어서 1학년 때부터 신문배달을 하고, 중2 올라가서는 전주역 구내에서 역무원들에게 내쫓김을 당하면서 이런저런 물건을 팔았다. 얼마 뒤부터 잡지나 단행본을 들고 다니며 팔았다. 그는 세상의 야박한 인심을 알게 되고 따뜻한 인정도 맛보았다. 

한승헌이 성장통을 앓으며 자라고 있을 즈음 3.8선으로 분단된 땅에 미군정이 들어서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했으나 설 땅이 주어지지 않았다. 신탁통치 문제로 갈라지고 송진우ㆍ여운형ㆍ장덕수가 차례로 피살되었다. 김구ㆍ김규식 등의 남북협상이 좌절된 가운데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암살당했다. 

그때 우리는 교실 책상에 엎드려 모두 훌쩍이며 울었다. 범인의 배후는 누구일까라는 의문이 세상을 덮었고, 더러는 이승만 박사일 것이라는 말도 나돌았다. 그런 혼란 속에서도 모두들 열심히 공부했다. 그 다음 해에 '한국전쟁'이 터질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채. (주석 7)

우리나라 근세 -> 근대 -> 현대사를 통털어 이들만큼 시대적 불운을 타고 난 세대도 드물 것이다. 그래도 해방을 맞지 않았느냐고 할 지 모르지만, 광복이 되지 못한 해방은 분단으로 이어지고 미군정이라는 새로운 사슬에 묶이면서 친일파가 청사되기는 커녕 새정부의 주도세력이 되고 있었다. 


중3 때 학제가 변경되어 고등학교제가 새로 도입되었다. 전북에서는 그가 다니던 전주북중에 전북고등학교(후에 전주고등학교로 개칭)가 신설되어 도내의 각 중학교에서 우수 학생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한승헌도 신설된 고등학교에 지원하여 합격하였다. 교육법 개정의 지연으로 6월 22일 개학한 지 사흘 만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북한군의 전면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이승만 대통령의 '서울 사수' 방송과는 달리 국군은 크게 밀리고 있었다. 

7월 16일 학교는 휴교에 들어갔고 그는 부모님이 계신 진안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마을에서는 전쟁관련 희생자가 없었다. 좌우대립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9.28 수복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가을에 휴교령이 해제되면서 학교는 다시 문을 열었다. 하지만 학교는 국군이 병영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전주남중학교의 일부 교실에서 더부살이 수업을 하였다.

학비를 벌어야 했다. 방과 후 전주역 근처의 도장ㆍ명함집에 일자리를 얻었다. 일거리가 많았고, 명함 찍고 도장 파는 요령을 습득하여 제법 숙련공이 되었으나 주인이 약속한 보수를 주지 않았다. 직종을 바꿔 아르바이트 필경사 노릇을 하여 제법 수입이 따랐다. 필경 일 때문에 학교공부 시간을 빼앗겨 고민이 많았다. 게다가 학도호국단이 생겨 군사훈련을 받아야 하고, 각종 시위ㆍ행진에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고3이 되었다. 학교에서는 성적이 좋은 그가 서울대에 진학하길 바랐다. 당시 서울대는 피난수도 부산에 있었다. 첩첩산중에 외롭게 사시는 부모를 두고 멀리 부산에 유학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절친이 자기와 함께 가자면서 서울대 입학원서를 챙겨 왔으나 부모님 가까이에 있고 싶다는 마음으로 전북대학에 입학원서를 제출하고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내 결정에 절대 후회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나는 그 다짐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주석 8)


주석
7> <자서전>, 36쪽.
8> 앞의 책, 42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한승헌 #시대의양심_한승헌평전 #한승헌변호사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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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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