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사회당 당수를 만났을 때의 모습1994년 3월 7일, 김대중 납치사건 해결을 위한 한일 양측 대표들이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사회당 당수(1994년 6월에 일본 총리가 됨)를 만났을 때의 사진. 가운데가 무라야마 도미이치 사회당 당수, 좌측에 한승헌 변호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변호인단은 김대중과 상의하여 서울형사지법에 대한 기피신청을 냈지만 서울고법은 이유 없다고 기각하여 다시 항고했다. 또 기각된 기피신청을 대법원에 재항고했다. 10월 중순에 이르러 법관기피신청 기각 결정에 대한 대법원 항고에 대해 대법원은 원심 판결을 취소하고 고법으로 환송했다. 법원끼리 핑퐁 끝에 12월 18일 법관기피 신청은 "이유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은 계속하여 '이유 없이' 지체되었다. 해가 바뀐 1975년 3월 7일 변호인단이 공판기일을 빨리 지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공판기일 지정신청'을 서울형사지법에 제출했다. 속개된 공판에서 변호인단은 관계법 조문이 사문화가 된 이상 공소를 취하할 것을 요구했다. '체육관 대통령선거'로 바뀌어 위반했다는 선거법 조문은 이미 사문화되었다.
공판은 단속을 거듭하고 윤보선ㆍ김상현ㆍ강문봉 등이 증언대에 섰다. 9월 12일 서울지법은 선거법위반 혐의로 5년을 구형했다. 다시 법관 기피신청과 법원의 기각, 재항고와 기각이 되풀이 되었다. 12월 13일 서울지법은 금고 1년과 벌금 5만 원을 선고했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된 김대중은 법원이 선거법위반 사건과 이 사건을 병합 심리키로 결정하였다. '납치살해' 기도에서 실패한 박정권은 법조항으로 묶기 위해 검찰과 사법권을 동원했다.
재판은 이례적으로 거의 매주 한 번씩 열렸다. 항소심을 맡아온 재판부에 1심인 이 사건이 배당된 것부터가 이상했다. 박세경ㆍ유택형ㆍ이택돈 변호사와 내가 변호인단으로 나섰다. 나는 재판이 있는 날마다 아침 일찍 동교동 김대중 씨 집에 가서 그날의 공판대책을 협의하고 함께 법정으로 나갔는데, 어떤 때는 중앙정보부 고위간부가 그 집에 나타나서 "오늘은 좀 적당히 해달라"고 간청인지 협박인지 모를 소리를 하기도 했다. (주석 1)
서울고등법원은 그 기피신청사건이 환송된 후 판사실에서 심리를 하였는데, 그 광경을 찍은 사진에 1심 녹음 검증 때 판사실에 들어와 있다가 문제가 된 정보부원이 이번에도 판사실 칸막이 위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장면이 포착돼 있어서 쓴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다. 나는 그 사건 변호에 열중하던 중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돼버렸기 때문에 재판의 후반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세월이 가고 세상이 변해서 1987년 6월항쟁의 태풍이 지나간 어느 날, 이 사건은 유죄도 무죄도 아닌 면소판결로 마무리되었다. 기소된 지 15년이 지나서 이른바 재판의 시효가 소멸돼버렸다는 이유였다. 왜 15년이 넘도록 재판을 끝내지 못하고 사건을 방치해두었을까. 사법부의 직무유기성 회피 체질이 여실히 드러난 실례였다. (주석 2)
주석
1> <정치재판의 현장>, 143쪽.
2> 앞의 책, 144~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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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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