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매달 20만 원씩 저축했다. 6학년이 되도록 특별히 쓸 일이 없어서 만 12년, 꼬박 144개월 동안 2880만 원 정도가 쌓였다.
최은경
집에 왔더니, 큰아이가 새로 산 운동화를 신고 갔다가 발이 너무 아팠다고 했다. 봄에 세일할 때 한 치수 큰 걸로 사 두었는데, 그 새 더 자랐나 보다. 둘째 아이는 여름 동안 키가 훌쩍 자라서 봄에 입던 옷이 전부 작아졌다. 학교에서 급식을 먹고 왔는데 배가 고프다고 냉장고를 뒤진다. 아이들은 학원만 다니는 게 아니라, 먹기도 해야 하고 입기도 해야 하는데, 사교육비에만 매달 300만 원이라니.
아이들이 자라면서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돈 때문에 못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매달 20만 원씩 저축했다. 6학년이 되도록 특별히 쓸 일이 없어서 만 12년, 꼬박 144개월 동안 2880만 원 정도가 쌓였다.
그 외에 나라에서 받았던 양육수당과 어른들로부터 받은 세뱃돈과 용돈들을 모은 800만 원 정도가 통장에 그대로 있다. 둘째 몫도 따로 모은다. 하지만 지인의 말대로 아이를 공부를 시키기로 하고 국영수 학원에 2년 반만 보내면 끝이라는 계산이 서자, 내가 너무 세상 물정 모르고 속 편하게 손 놓고 있었나 싶어졌다.
간식을 먹는 큰아이 앞에 앉아, 친구 학원이 어딘지 물어보았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책에 눈을 둔 채, 다시 생각해 보니 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되겠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이내 아이에게 부끄러워졌다. 혹시 내 한숨이 아이에게 들렸을까? 집에 들어올 때 어두웠던 표정을 읽은 걸까?
아이가 공부에 특별한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돈이 많지도 않으면서 자식을 셋이나 낳는 부모를 만나, 공부할 기회도 못 얻고 재능이 묻히게 되는 건 아닌가 싶어 죄스럽기도 하다. 통장에 돈을 모으면서, 이것으로 부모로서 책임을 다 했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학원은 본인이 다니고 싶어 할 때까지 기다려 준 거고, 대신 그 돈을 다 모아 두었으니 언제라도 기회를 줄 수 있다고 큰소리 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는데,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아서 좀 씁쓸해졌다.
아무튼, 아이가 셋인 게 문제가 아니라, 아이에 대한 책임의 다른 말이 경제력이라는 현실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아기였을 때부터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사교육의 혜택이 다르고, 그 사교육을 조장하는 '좋은 대학'이라는 말이 문제이고, '좋은 대학'을 나와야만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는 사회구조가 기괴하다고 믿었다.
"숲은 비료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비료를 주지 않아도 숲은 날로 깊어가는 법을 압니다. 굳이 날갯짓을 배우지 않아도 새가 스스로 창공을 가르며 날아오를 수 있듯이 자연의 모든 생명은 이미 그 안에 스스로 자라고 익어가는 법을 품고 있습니다."
<숲에게 길을 묻다>(180쪽) 같은 책 속 구절을 필사하면서 초등학교 6학년이 되도록 버텼지만, 코앞에 닥친 것 같은 아이의 미래에, 나는 쉬이 불안해지고 만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15
공유하기
"수능 점수는 부모 재력 순" 반박 불가인가요?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