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9월 15일 김대중 납치사건 일본 측 진상조사위원회의 덴 히데오 참의원이 방한했을 때의 사진. 김대중, 김대중 좌측에 덴 히데오 참의원, 덴 히데오 좌측에 한승헌 변호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재판은 여름에 이어 가을까지 계속되었다. 11월 13일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3년형이 선고되었다.
민간인이 군사재판에 회부되고 민주주의 국가들의 상례인 3심제도가 사라진 2심제 군사재판이었다. 그는 최후진술에 나섰다. 20분 간의 시간이 주어졌다. 요지다.
내가 재판부에 요구하는 것은 우리들의 형기의 장단이 아니라 유ㆍ무죄를 제대로 판단해 달라는 것이다. 민주화를 요구한 우리들이 민주화를 약속한 정부에 의해서 체포된 것은 매우 코믹한 일이다. 우리는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정부를 비판했다. 비판을 한 사람이 어떤 대우를 받게 되느냐로 그 나라의 민주주의의 척도가 결정된다. 최근의 사회적 혼란은 정부를 비판할 자유가 없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닌가. (주석 4)
기결수가 된 그는 군용차에 실려 행선지도 모르는 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창문에 스치는 방향은 남쪽이었다.
나를 싣고 간 군용차의 종착지는 뜻밖에도 김천소년교도소였다. 나이 50을 향해서 '일로매진'하고 있는 나를 어찌하여 소년교도소에다 집어넣었을까? 궁금증은 곧 풀렸다. 악독한 군사정권도 내가 소년처럼 천진난만하다는 점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어서 나만 소년교도소로 보냈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입주(?)하게 된 곳은 이른바 '특별사'라고 해서 외딴 독채에 나 한 사람만 수용되었다. 그 전까지의 독방생활이 그곳에서는 독채생활로 격상된 셈이었다. 그러나 방 5개로 된 작은 건물의 한가운데 방을 차지하고 있으니 옆방도 또 그 옆방도 텅텅 비어 있는 불길한 고요함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런 중에도 나에게는 마음에 드는 일 한 가지가 있었다. 마치 학교교실의 유리창처럼 옆으로 여닫는 창문이 시야를 시원하게 넓혀주어 감옥살이의 답답함을 덜어주었다. (주석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