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헌 변호사
정대희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의 염원과는 달리 1987년 12월 실시된 제13대 대선은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민주진영의 좌절ㆍ패배감은 엄청난 트라우마를 일으켰다. 법조계도 다르지 않았다.
74명의 변호사들이 '국본'에 참여하고 집단시위까지 벌였던 이들은 "국가권력의 조직적 억압에는 조직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데 공감"(주석 1)하고 창립한 조직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다.
1986년 망원동 수재사건과 구로동맹파업사건을 계기로 설립된 '정의실현법조인회(정법회)'와 6월항쟁 등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젊은 변호사들의 모임인 '청년변호사회(청변)'이 1988년 5월 28일 합치면서 민변이 창립되었다. 초대 간사는 조준희 변호사였다.
민변은 회원이 늘어나면서(약 1,000여 명) 총 15개의 위원회와 서울 외에도 8개의 지부가 구성되었다. 민변의 각급 위원회는 사법국제연대ㆍ노동ㆍ미디어언론ㆍ여성인권통일ㆍ환경보건ㆍ미군문제ㆍ과거사청산ㆍ민생경제ㆍ교육청소년ㆍ소수자인권ㆍ국제통상ㆍ아동인권ㆍ디지털정보위원회 및 다양한 TF와 연구모임과 공익인권변론센터가 별도로 설치되었다.
나는 본시 '단체선호형'이 아니어서 집단의 형성에는 소극적인 사람이지만, 정법회나 민변의 시동에는 적극 찬성이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군사독재의 암울한 기상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런 변호사모임이 출범할 때 내가 한 일이라고는, 정동에 있는 배제빌딩에 민변 사무실을 마련하고 개소식을 하던 1987년 7월 7일, '민변'의 현판을 만들어가지고 가서 걸어준 것 뿐이었다.
간판 글씨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거라도 해서 '맨손'(수수방관)을 면하자 싶어 서툰 붓글씨나마 정성들여 써가지고 인사동에 가서 판각(板刻)을 해서 들고 갔던 것이다. 그 현판은 서초동 민변 사무실 문지방에 그대로 걸려 있다. (주석 2)
민변은 그동안 군사정권과 부패권력 하에서 시대적 징표의 역할을 하였다. 5.18진상규명 및 학살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가두시위, 인기부법ㆍ노동관계법 날치기 통과에 대한 항의농성 등 집단행동과,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을 비롯 주요 인권침해사건의 조사활동 등 인권ㆍ사회정의 구현에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한승헌은 이 시기 50대 초반으로 중진급에 속했지만, 젊은 변호사들과 토로하고 집단행동에도 빠지지 않았다. 그의 <법조인의 멋>이라는 글에서 변호사의 시대적 역할을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크게는 사회정의와 인권수호의 일선에 나서는 일, 작게는 한 개인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 누구의 간섭도 받음이 없이 오직 법과 양심에 따라 파헤치고 싸우고 매듭짓는 신념, 이런 게 변호인의 멋으로 통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독선이나 오만 또는 자기과신의 흠이 끼여들지 않을 경우에 한하여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법조계는 당장 내세우거나 앞으로 기대할 멋보다는 퇴색되고 망각되어가는 것이 멋이 더 많은 것 같다. 참멋을 추구하고 가꾸기보담 현실에 투항하여 겉멋이나 살리려는 풍조가 너무나 거센 탓일까? (주석 3)
주석
1> <자서전>, 287쪽.
2> 앞의 책, 289쪽.
3> 한승헌, <법과 인간의 항변>, 363~3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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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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