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테 콜비츠. '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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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역사와 현실의 고통을 직시한 케테 콜비츠의 작품 〈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은 자식 잃은 부모가 느끼는 극한의 고통을 처절하게 담아냈다.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이, 죽을 수도 살 수도 없이 연옥 같은 삶을 살아내야 하는 그 비통의 시간이 영원처럼 물화된 작품이다. 콜비츠는 1차세계대전에서 아들을, 2차대전에서는 손자를 잃었다. 어떻게 하늘을 보고 살 수 있었겠는가.
시월의 끝자락에 수많은 젊음이, 우리의 자식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곳에서, 도저히 그럴 수 없는 방식으로 숨이 멎었다. 참사를 우려하는 적잖은 경고와 신고가 있었다. 끝내 참사로 이어진 수많은 허위와 허술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하지만 책임자는 없다. 책임 있는 인사의 진정한 사과도, 합당한 문책도 없다. 오히려 이 참사를 방지하거나 대비해야 했던 공무와 행정의 꼭대기 사람들이 시시비비를 가리는 책임자를 자임하고 있다. 책임을 묻는 자는 있어도 책임을 지는 자는 없다.
하지만 우리에겐 기억이 있다. 고통이 분노가 되고 분노가 저항이 된 기억, 촛불이 저항의 물결로 출렁이던 기억, 무책임한 권력이 촛불시민의 궐기로 한순간 무력(無力)으로 추락한 빛나는 기억이 있다. '역사의 기억'으로 켜켜이 쌓은 경험과 성찰이 '미래의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과거의 교훈과 현재의 책임을 외면한 권력의 미래도 마찬가지다. 철학자 푸코는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고, 권력에 맞서는 '하나의 거부'가 아니라 '여러 저항들'이 존재한다고 썼다.
타인의 고통과 공감에 둔하고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모르는 권력이 있다. 공감 없는 권력에 시민의 공감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책임 없는 권력에 스스로 책임지는 시민은 있다. 그 책임은 그런 권력을 향한 '분노와 저항'이다. 하나가 아니라 도처에서 몰아치는 '거부와 저항'이다. 한반도를 불태운 '촛불의 과거'를 잊었다면, 남은 것은 '촛불의 현실'일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숱한 저항이 빚어낼 '지나간 미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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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부산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있으며, 저서로는 『68혁명, 상상력이 빚은 저항의 역사』, 『저항의 축제, 해방의 불꽃, 시위』(공저), 역서로 『68혁명, 세계를 뒤흔든 상상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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